가벼움 뒤에 드리운 슬픔의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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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민용태 시인(59·고려대 서어서문과 교수)이 시집 『나무 나비 나라』를 냈다. 가끔 TV 오락프로그램에 나와 재담도 떨곤 하던 그 '교수님'의 시집엔 역시나 가벼움이 넘쳐난다. 그러나 그 장난기와 가벼움에 드리워진 슬픈 그림자는 삶의 근원적 한계를 되짚어 보게 한다. 이 시집은 "허위와 가식의 옷을 벗기고 세상을 바라보는 장난기의 미학"(오세영),"새로운 정서의 교직체가 담긴 신판 서정시"(김용직)란 평을 받았다.

"모기는/모 기관의 정탐원이거나/정을 못 버리는 옛 사랑의 가시거나…모기의 잔학성에 대하여/나는 반항한다//…/저놈은 분명 내게 할 말이 무척 많은 모양이지만/나는 다 알고 있다/…/아름다운 시절의 나의 피를 되씹고 되빨아 내며/조금 간지럽히겠다는, 약간 근지럽히겠다는/모 기관의 조용한 잔학성"('모기' 중)

모기에서 모 기관을 연상하고 모모 여인을 사랑한 기억을 떠올린다. 저나 나나 원한이랄 게 없는데도 왜 자꾸만 윙윙 거리느냐는 항변, 할 수 있는 저항이란 "항아리보다 깊은 잠들기/눈 감기, 뚜껑닫기/별 보고/돌아눕기"다.

자고 깨고 자고 깨고, 밥먹고 일하고 밥먹고 일하는 지옥같은 하루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현대적 삶의 단순성, 그 단순함의 무식한 반복을 앞에 두고 시인이 감행하는 실존적 결단은 가볍게 걷기다.

시가 별거냐, 파리 똥처럼이라도 붙어 있자, "하고 싶은 여자가 많아서/하고 싶은 일을 시로 쓴다"(시 쓴다는 일)고 짐짓 태연하게 내뱉고, 이름이 이필녀라던가 임정애? 화성녀? 같은 그 여자들을 KBS 본관 정문 앞에서 만나기를, 어느 별똥별이 지금 지구와 충돌해도 감행하겠다는 것이다.(장군의 비밀)

지금의 내가 없고 내가 아닌 곳, 즉 나, 무(無), 나, 비(非) 나라에서라야 자신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나무 나비 나라)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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