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패륜범의 경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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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11일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를 급랭시킨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멀쩡한 대학생이 교수인 아버지와 학원장인 할머니를 무참히 살해하고 시신마저 불태웠다. 인간의 탈을 쓰고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엄마 젖만으로 성장 못해

물론 존속살해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가까이는 2000년 5월 명문대생인 모씨도 부모를 토막살해하고 시체마저 유기해서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들 두 패륜범은 무식한 부모 밑에서 천덕꾸러기로 어렵게 살아온 것도 아니다. 부모는 모두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고 가정도 중류층 이상이었다. 그리고 부모는 그들 나름대로 자식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나 해괴한 일은 두 존속살해범인 중 한 사람은 어머니를, 그리고 이번의 용의자는 아버지를 극도로 증오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증오의 원인을 아버지나 어머니가 애정을 베풀지 않고 공부만 강요했고(전자의 경우),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했다고 늘 업신여겨 온 탓으로 돌렸다(이번 사건의 경우).

이유야 어떻든간에 이 두 존속살해범은 패륜아라는 너울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왜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가정에서 이러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는가를 짚어보아야 한다.

인간은 어미의 젖만으로 성장하는 동물은 아니다.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의 공부에만 골몰하다 보면 자칫 자식으로부터 비정한 부모, 혹독한 부모로 낙인된다. 또 일부 부모에게 국한된 일이긴 하지만 자식의 명문대 입학에 대리 만족하는 부모도 있다. 곧 자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집안의 체면, 자신의 명예 때문에 자식의 공부를 독려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명문대 출신의 박사 교수도 자식의 저조한 학업능력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고 이것이 부자간의 관계를 멍들게 한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자식이 부모를 보는 눈도 이제 많이 달라졌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조선시대에서는 부모가 제 할일을 다하지 않고도 버젓이 자녀에게 효를 강요했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자식이 크면 그에 걸맞게 자식의 인격과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 그러한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인터넷을 하는 자식에게 삼강오륜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살해범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었다. 한 사람은 중·고등학교를 거쳐 군대에서까지 왕따를 당했다. 다른 한 사람은 검정고시,캐나다 유학, 다시 국내 재입학을 한 경력으로 따져볼 때 그 역시 한 마리 외로운 늑대였을 것이다.

두 존속살해사건은 빨리 잊고 묻어버려야 할 그러한 망국적 사건으로 간주하면 우리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 사건을 철저히 분석해 이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어찌보면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오래된 병폐가 한꺼번에 곪아터진 것이다.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자녀를 조기 유학시키고 부부가 별거 아닌 별거를 하는 현실, 인생을 즐기고 친구를 사귀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하는 지식 위주의 학교교육, 왕따 문제, 폭력 미디어 등등이 이들 사건의 배후인물이 아니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사람 사랑할 줄 아는 교육을

이제라도 각급학교에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감정의 교육을 서둘러야 할 때다. 두 살해범은 학교에서 인간의 심정을 헤아리고 자신의 분노를 통풍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어야 한다. 생활연령상으로 볼 때 이 둘은 성인(두 범인의 나이는 각기 23, 24세임)이고 지능 역시 높은 편이었지만(한 사람의 IQ는 1백28임) 이들의 정서지능, 즉 EQ는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최근의 두 존속살해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 사건은 우리의 비뚤어진 가정 및 학교교육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사회의 잘못된 병리현상 곧 학벌중시, 해외조기유학, 왕따 및 외톨이 현상, 그리고 늘어가는 가족구성원간의 소외 및 갈등에 대해 큰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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