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불감증 어디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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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발생한 대학생의 아버지와 할머니 살해·방화 사건은 인간성 상실이라는 사회 병리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명문대를 나온 대학교수 아버지의 기대와 엘리트 의식에 대해 반감을 가져왔다는 대학생 아들이 범행을 저질러 일부 신세대 젊은이들의 도덕 불감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아버지와 할머니를 살해한 아들은 범행 은폐를 위해 시체와 집에 휘발유를 끼얹어 불을 지른 뒤 친구집으로 달아나 알리바이까지 조작했다.

미국에 유학 중인 자녀 뒷바라지를 하다 귀국한 어머니가 12일 오전 아들을 면회한 뒤 "아들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는지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패륜 범죄는 그동안 정신 이상이나 순간적인 착란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제는 대학생 등 비교적 정상적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어 더욱 문제다.

2000년 5월 경기도 과천에서 서울 명문대 1년 휴학생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안방에서 잠자던 부모를 둔기로 때려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또 1994년 5월 朴모(당시 23세)씨가 미국 유학 중 도박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부모를 흉기로 살해한 뒤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방화, 패륜범죄가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黃相旻)교수는 "이번 사건의 경우 유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점으로 미뤄 볼 때 충동억제 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면서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는 어머니가 함께 생활했다면 극단적인 경우로 치닫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鄭惠信)씨는 "극단적으로 권위적인 부모 아래에서는 청소년들이 위축돼 있다가 충동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면서 "서로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부모와 자식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존속살해·존속폭행 등 패륜범죄는 1997년 7백96건, 98년 1천1백60건, 99년 1천3백79건, 2000년 1천5백74건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한편 분당경찰서는 12일 낮 12시40분부터 범인인 아들 모(23·S대 3년 휴학)씨를 데리고 50여분간 현장 검증을 실시했다.씨는 집 안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다 현장 검증이 시작되자 경찰의 질문에만 답하며 범행 장면을 재연했다.

정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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