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되는 특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초라한 기술력의 현주소=미국 MIT의 기술전문지 '테크놀로지 리뷰'는 최근 '2002년 분야별 기업 기술력 평가'를 발표했다. 전자·반도체·바이오·화학·자동차·항공 등 각 분야 기업들의 특허·연구개발 투자·기술혁신 주기 등을 종합 평가했다.

여기서 분야별 50위 안에 든 국내 기업은 삼성전자(전자분야 5위)·LG전자(전자 19위) 뿐이었다. 그나마 삼성전자는 지난해 4위에서 한 계단 떨어졌다.

반면 대만은 혼하이가 컴퓨터 분야 8위에 오르는 등 모두 7개 기업이 50위 안에 들었다.

국내 기업은 자동차와 통신 분야에서도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IT 강국'이라는 표어가 무색할 정도다.

우리 기업 기술력의 실상은 삼성전자가 아직도 잉크젯 프린터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수출하는 데서도 드러난다.휼렛패커드·제록스 등 이 분야 핵심 기술을 가진 업체들이 시장을 고수하려고 기술 이전을 않고 있어 삼성전자는 기술 보유 업체인 '렉스마크(lexmark)'의 상표를 달아 수출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삼성전자가 자기 브랜드로 수출하기 위해 렉스마크를 인수하려 한다는 얘기까지 나돌고 있다.

세계 잉크젯 프린터 시장은 한해 6천만대 규모로 레이저 프린터의 5~6배에 이른다.

◇적자투성이 기술무역수지=우리 경제의 버팀목인 반도체는 매출의 12%를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에 기술료로 내준다. PC도 10%는 역시 기술료로 IBM 등에 바친다.

이처럼 외국 기업에 내는 기술료로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기술무역적자를 겪고 있다.

2000년 우리나라 기술 수출은 2억달러(약 2천5백억원)인 반면 기술 수입은 그 15배인 30억달러(3조8천억원)다.

수출이 수입의 6.9%에 불과하다. 그나마 1999년의 9.2%보다 줄었다.

<표 참조>

수입은 80%를 미국과 일본에 의존하고,수출은 중국과 동남아 지역 위주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동현 박사는 "제조업은 선진국의 원료를 수입, 재가공해 다시 선진국에 수출할 수 있었으나 기술은 불가능하다"며 "때문에 우리의 기술력으로는 앞으로도 큰 폭의 적자를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기술료뿐 아니라 핵심 부품도 수입에 의존한다. 반도체를 누르고 최근 수출 1위 상품으로 올라선 액정표시장치(LCD)도 핵심 원료인 액정은 전량 수입한다.

특허청에 따르면 국제시장 점유율이 점점 올라가고 있는 휴대전화도 가격 기준으로 부품의 56%가 수입이다.

산업용 로봇의 부품은 80%를, 컴퓨터는 40%를 수입하는 등 첨단 제품일수록 부품 수입 의존도가 높다.

첨단 제품에 있어 우리나라는 아직도 부품을 사다 조립해 수출하는 신세인 것이다.

◇심상찮은 국제 기류=최근 소니·파나소닉 등 DVD롬 드라이브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국내 생산업체인 LG전자·삼성전자 등에 높은 기술료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DVD롬 드라이브는 곧 컴퓨터의 CD롬 드라이브를 교체해 막대한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소니 등의 요구는 기술을 무기로 우리 업체의 DVD롬 시장 진입을 저지하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일본 도시바(東芝)도 얼마 전 삼성전자가 D램 기술 특허를 침해했다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배상보다 무언가 다른 부분에서 기업간 제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전략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내 전자회사들에 대한 국제특허 침해 소송도 99년 80여건에서 지난해에는 그 두배 이상인 1백70여건으로 늘어났다. 선진기업들이 특허권 보호에 적극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과 일본이 2004년부터 양국 중 어느 나라에서라도 특허를 받으면 서로 특허권을 인정해 주도록 하겠다고 합의한 것도 우리 기업에는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본지 6월 7일자 41면> 미국과 일본은 상대국에 내는 연간 수억달러에 달하는 특허 출원과 유지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학상 연구원은 "마쓰시타(松下)·소니 등은 특허 관련 조직을 본부로 확대하고 인원을 수백명 선으로 대폭 확충하고 있다"면서 "우리 기업들도 핵심 특허 개발에 집중 투자하는 선별 전략을 펼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승일·권혁주 기자,이은주 조사기자

'한해 내국인 특허 출원건수 세계 4위'-. 우리나라가 지식산업 강국임을 내세울 때 쓰는 표현이다. 그러나 건수는 많지만 정작 돈 되는 특허는 드문 '허울 뿐인 특허강국'이라는 실상이 이번 특허청 조사에서 드러났다. 기업들이 주변 기술에 대한 특허를 양산하는 사이에 외국에서 무더기로 사와야 하는 핵심 기술들은 더욱 늘고 있다. 우리나라가 만성적인 기술무역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기업의 기술 경쟁력 평가에서도 우리나라의 성적표는 대만에조차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