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戰 앞두고 일부 反美 움직임 "월드컵정신 훼손" 자제 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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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팀이 월드컵 본선 16강에 진출하는 데 분수령이 될 오는 10일의 대(對)미국전 때 길거리 응원이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에 편승한 반미(反美)시위 움직임을 보여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인터넷 게시판에는 반미 감정을 자극하는 글들이 많이 오르고 있으며 일부 진보 단체에서는 경기 당일 길거리 응원 장소에서 반미 행사를 열 계획이다.

이에 대해 많은 시민은 "길거리 응원은 이미 전세계가 주목하는 월드컵의 명물이 됐다"며 "스포츠 행사장을 정치적 구호로 물들여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주한 미국 대사관과 미국 상공회의소 등은 10일 오후 업무를 중단하기로 결정했으며, 경찰은 병력을 대폭 늘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다.

◇반미 분위기=일각에서는 대미국전 응원과 관련해 지난 겨울올림픽의 '오노 사건'과 차세대 전투기 선정 등을 둘러싸고 일어난 반미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 다음 등 인터넷 게시판에는 "미국전에 승리하는 날 대구 시내엔 미국 반대와 통일을 바라는 시민들로 물결칠 것"이라는 내용의 글 등이 이어지고 있다.

한총련은 반미 행사를 더욱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10일 전국 대학별로 교정에 대형 TV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응원 구호를 응용한 "미~국반대, 통~일한국"등을 외치며 응원전을 펼칠 계획이다.

일부 대학에선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판에 축구공을 차는 행사를 하고 미국을 비난하는 글이 담긴 티셔츠를 보급하기로 했다.

또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미군 부대 고압선에 감전돼 숨진 전동록씨의 노제를 10일 광화문에서 지내기로 했으며, 이 행사에 한총련 학생이 다수 참석할 예정이어서 반미 시위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미 대사관 휴무=경찰은 미 대사관·미 대사관저 등에 대한 기습 시위 등을 막기 위해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 일대에 53개 중대를 투입할 방침이다. 지난 4일 대 폴란드 전 당시 투입한 병력(15개 중대)의 세배 이상 되는 규모다. 또 대구 경기장에서 응원단이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훌리건 전담 부대 등 5천여명의 경찰관을 경기장 안팎에 배치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사이버 수사대 6백여명을 투입해 사이버 공간에서 반미 감정을 부추기는 행위도 단속하기로 했다.

주한 미 대사관과 미 상공회의소는 7일 "한국 대 미국전이 열리는 오는 10일 오후 휴무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직원들의 경기 관람을 위해서"라는 게 미 대사관 측의 설명이지만 반미 시위 등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성숙한 응원 문화 기대=서울대 정치학과 안청시 교수는 "축구 경기 응원장에서 반미 시위를 하는 것은 월드컵 정신에도 어긋난다"며 "잘못하면 한국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전세계에 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김재범 교수는 "전광판 응원이 나눔을 중시하는 우리 문화를 반영한 월드컵의 명물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마당에 길거리 응원을 정치적 목적으로 변질시키려는 시도는 절대적으로 반대한다"고 말했다.

붉은 악마 관계자는 "경기 상황에 따라서는 응원 도중 일부 반미 구호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을 더 큰 소리로 외쳐 묻어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대구지역 미국 서포터스 5백70명도 당일 미국팀의 응원에 주력하기로 했다.

대표 박순종(朴淳鍾·49·제조업)씨는 7일 "미국팀 응원을 반대하는 일부 회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다섯차례나 모임을 가졌다"며 "대부분의 회원들은 '우리팀의 선전을 기원하지만 잔치집에 온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 주인의 도리'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응원을 위해 카우보이 모자와 성조기 스카프 등을 준비한 이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성숙한 한국인의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강주안·이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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