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그래도 JP여" "JP 말도 끄내지 마러. 망신을 얼마나 더해야 하는 겨" "이도 저도 뵈기 싫구먼. 난 그만둘껴".

지금까지 선거보도는 '아무개(나이·직업)는 이렇게 말했다'며 해당 계층·세대의 투표성향을 암시하는 게 관행이었다. 하지만 대전 시장선거 취재차 6일 현지에서 만난 40대 중반 남자 세명의 언급은 그런 방식이 여기선 통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유사한 연령·학력·직장인임에도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투표자의 일반성이나 대표성이란 게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유권자의 엇갈림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헷갈림이라고 할지.

1980년대 중반 JP의 정계복귀 이후 대전·충남 유권자의 투표행태는 단순·명료했다. 그게 신민주공화당이건, 민자당이건 자민련이건 JP가 있는 정당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줬다. 3金 지역분할 구도의 소산이지만, 어쨌든 유권자들은 주저없이 JP쪽에 표를 던졌다. 이게 현 정권 들어 바뀌었다. DJP 공조에서 소박맞은 이후 많은 지역민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욕보다 더 싫은 게 뭔지 압니까. 경멸입니다." 열렬한 JP 지지자에서 극렬한 반대자로 돌아선 50대 초반 李모(회사원)씨의 침튀기는 일갈이다. 진한 배신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5일 한나라당 정당연설회에 나타난 이회창 후보가 "자민련이 권력의 곁방살이를 하다 충청인의 자존심을 구기게 했다"고 JP를 몰아붙인 것도 이같은 지역민의 감정을 읽은 결과일 터이다. 李후보는 대통령후보도 못낸 자민련은 곧 소멸할 것이라며 한발 더 나갔다.

야유와 조롱이 잔뜩 묻어나는 李후보 연설을 전해들은 JP는 6일 "대선을 준비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JP의 말을 귀담아 듣는 지역민은 별로 많지 않은 듯하다. 물론 예전에 비해 어림없다는 뜻이다. 아직도 의리를 강조하며 동정을 보내는 유권자는 그런 대로 남아 있었다. "속이야 쓰리지요. 그런들 어떡합니까." 자영업을 한다는 60세 남자의 연민 섞인 JP지지 이유다.

여하튼 JP를 전제한 '묻지마 투표'가 사라진 이후 선거는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李후보는 대전을 차지해 12월 대선에 쐐기를 박겠다는 계산이고, JP는 여기를 잃으면 끝장이라는 판단 아래 결사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그 가파른 대치결과의 하나가 한나라당 염홍철 후보와 자민련 홍선기 후보간의 엎치락 뒤치락 백중지세다. 국회 제2당이면서도 공조를 빌미로 시장 후보조차 안낸 민주당이 자민련을 돕는 데도 그렇다. 지난달 하순 본지의 여론조사는 廉후보가 28.7%, 洪후보가 28.5%. 굳이 차이라 할 수 없는 박빙이고 선거 닷새를 앞둔 7일 현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각기 자신의 당선을 자신하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다. 누구도 큰소리 칠 계제가 아닌 것이다. 양측 캠프 핵심 참모들의 "피를 말린다"는 고백이 전황을 잘 말해준다.

"보기에 따라선 廉후보가 다소 앞선 듯하다. 그러나 '이회창 대통령'을 기대하는 한나라당 바람도 간단치 않고, 洪후보는 현역 시장이라는 이점이 있다. 퇴색했다지만 JP의 선거막판 지원유세가 더해지면 사태는 달라질지 모른다. 50% 미만일 투표율도 변수다." 선거를 꿰고 있다고 자부하는 田모(48·언론인)씨의 분석이다.

한표가 아쉬운 선거가 되다보니 점잖다는 평을 들어온 廉·洪후보 모두 상대 비난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열을 올리는 사람들은 후보와 운동원들뿐. 다수 유권자들은 남의 일 대하듯 한다. 정말 무관심인지, 의뭉인지 모르나 겉보기엔 그렇다. '국민은 무섭다'는 말이 새삼 와닿는 현장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