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4>제102화 고쟁이를 란제리로 : 3. 재봉선 없는 스타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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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중에 나와 있는 스타킹은 망사처럼 생긴 게 주류였다. '피시넷(fishnet) 스타킹'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어망처럼 작은 구멍이 송송 나있어 속이 훤히 비쳤다.

나는 65년 브래지어 생산을 시작했지만 스타킹은 훨씬 이전부터 생산했다. 비비안의 전신인 남영염직을 57년 세워 스타킹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당시에는 '트리코트'라는 편직기계로 천을 짰다. 하지만 스타킹을 지금처럼 단번에 원통형으로 짜내지는 못했다. 일단 평면으로 짠 다음 바느질로 꿰매 완성품을 만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스타킹의 위에서 아래로 발바닥까지 재봉선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멀리서 보면 종아리에 흉터가 나있는 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볼품 없었지만 당시로서는 으레 그러려니 했다.

63년 어느 날 이탈리아에서 두 명의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로나티(LONATI)라는 회사를 경영하는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로나티는 현재까지도 스타킹 편직기를 생산하는 세계적인 이탈리아 기업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성을 그대로 회사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로나티 부자는 사업차 일본에 들렀다가 한국에도 여자 속옷을 만드는 회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수소문을 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로나티 부자는 이렇게 말했다.

"스타킹에는 재봉선이 없어야 여성의 다리가 예쁘게 보입니다. 당신이 만드는 스타킹은 재봉선 때문에 여성의 매끈한 다리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재봉선이 없는 스타킹이라뇨?"

"심리스 스타킹이라고, 재봉선 없는 스타킹을 짜는 기계가 있습니다."

로나티 부자는 자신들이 가지고 온 기계를 보여주었다.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짠 천으로 스타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서 바로 둥근 모양의 스타킹 완제품이 나오는 게 아닌가. 재봉선 자국도 전혀 없었다. 그 신기한 기계를 보는 순간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심리스 스타킹 기계를 17대 주문했다. '심(seam)'이란 '솔기'란 뜻이므로 '심리스(seamless)'하면 '솔기가 없는' 스타킹을 이르는 말이다.

이 기계는 한국에서 내가 최초로 도입했다. 일본에서도 그 무렵 이 기술을 도입했다. 아무튼 재봉선이 감쪽같이 사라진 스타킹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밀리는 주문을 대기 위해 나는 심리스 스타킹 기계를 계속 수입했다. 불과 몇년도 안돼 기계는 무려 50대로 늘어났다. 나는 심리스 스타킹을 일본이나 홍콩에 수출도 하고 싶어졌다. 수출물량을 생산하려면 기계가 더 필요했다. 하지만 기계 값이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마침 그때 일본 이토추(伊藤忠)상사의 소개로 일본인 미나미 나이론회사의 미나미 히데미스(南秀光)사장을 알게 되었다. 미나미 사장은 국회의장을 지낸 정래혁(丁來赫)씨와 일본 육사 동기생인데, 자신의 엉덩이에 몽고인 반점이 있다고 해서 자칭 '몽고족'이라고 하며 내게 "동일민족이니 형제처럼 지내자"고 했다. 이토추상사가 미나미 사장을 소개한 것은 한국에 심리스 스타킹 공장을 합작으로 세우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 합작을 하면 기계를 많이 사들일 수 있고, 일본에 자연스럽게 수출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70년에 내가 50%, 미나미 사장이 30%, 이토추상사가 20%의 지분으로 충남 천안에 합작회사 '남남나이론'을 설립했다. 나와 미나미 사장의 성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렇게 투자해 심리스 스타킹 기계 1백40대를 들여왔으며, 일본과 홍콩 수출에 나서게 되었다. 우리 스타킹의 홍콩시장 점유율은 30%나 됐다.

홍콩에 수출한 스타킹의 브랜드는 '아나벨(ANNABEL)'과 '시팅 걸(SEATING GIRL)'이었다. 둘 다 내가 생각해서 지은 것인데, '아나벨'은 발음이 좋아서, '시팅 걸'은 '앉아 있는 여자'란 뜻으로 지었다. 상표에 서양 여자가 스타킹을 신고 앉아 있는 사진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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