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리나 피해 땐 사람 다치고 건물은 무너졌어도 바다는 남아 있었는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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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호 04면

석유 시추시설 폭발로 인한 대량의 원유 유출 사고로 멕시코만 일대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인근 해안에서는 기름 오염을 막기 위한 방제 작업이 한창이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찾은 미국 앨라배마주 남부 해안 오렌지 비치는 텅 비어있었다. 바다를 멍하니 응시하는 주민 몇이 있을 뿐이다. 예년 같으면 6월은 바다를 즐기려는 관광객이 북적일 때다. 기름 먹은 바닷물이 들락거린 백사장은 누렇게 색이 변했다. 시커먼 바다 위에선 두 척의 배가 주황색 오일펜스를 계속해서 쏟아내는 중이었다. 이미 880㎞에 달하는 오일펜스와 기름 흡착제로 멕시코만 연안을 감쌌지만 해안으로 밀려오는 기름띠를 막지는 못했다. 바닷속을 공처럼 뭉쳐서 돌아다니는 기름 덩어리(오일볼·Oil Ball)가 햇볕을 받아 터지며 수㎞까지 기름 막을 퍼트린다.

기름띠와 싸우는 멕시코만 오렌지비치·엠파이어항 르포

기름 먹은 바닷물이 궁금해 손발을 넣어봤다. 따뜻했다. 바닷물에 적신 손을 코에 갖다 대자 역한 기름 냄새에 숨이 턱 막혔다. 머리가 띵 하고 속까지 울렁거렸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손으로 받아 냄새를 맡고 있다는 착각까지 일었다. 해변 입구에 설치된 샤워기를 틀고 손발을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손에 밴 기름 냄새와 미끈거림은 쉽게 가지지 않았다.

영국 석유 메이저인 BP가 심해 석유를 끌어올리던 유정 파이프가 폭발하면서 원유가 바닷속으로 유출된 지 2개월이 넘었다. 바닷속 유정에서 뿜어져 나온 원유는 멕시코만 일대를 죽음의 기름 밭으로 바꿔 놓았다.

잭슨항의 긴급조류재활센터에 있는 곽재민 기자.

해변에서 방제작업을 지켜보던 주민 킴 레이본(29·미술가)은 “며칠째 바다에 나와 기름이 멈추길 기도하지만 백사장의 누런 기름띠가 점점 넓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주민 레베카 패럴(36·주부)은 “바다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빈 해변이 주는 허무함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이때 바람이 ‘훅’ 하고 불어왔다. 바람과 습기에 뒤섞인 매캐한 기름 냄새가 다시 코를 찔렀다. 해변에 나와있던 사람들은 코와 입을 막으며 “역겹다! (Disgusting)”고 소리쳤다. 제임스 프리셰(40·기념품 판매)는 “바람이 북풍으로 바뀌어 육지 쪽으로 불면 온 마을이 기름 냄새로 뒤덮인다”며 “이렇게 검은 바다와 기름내 진동하는 도시를 누가 찾겠냐.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곳이 잊힐까 두렵다”고 말했다.

“3대가 살아온 터전 졸지에 잃어”
전날 다녀온 항구의 분위기는 더 처절했다.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공항에서 남부 해안으로 향하는 23번 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에서 들은 라디오에서는 BP를 비난하는 얘기뿐이었다. “BP의 토니 헤이워드 CEO가 요트 경기를 관람했다고 하더군요. 피해지역 주민들을 두 번 죽이는 처사가 아닌가요.” 지역 신문은 원유 유출 기사로 도배하다시피했다.

그렇게 도착한 루이지애나주 남부 해안의 엠파이어 항. 항구를 중심으로 20여 채의 주택과 낚시 용품 상점이 모여있었다. 전형적인 작은 어촌 마을 풍경이다. 기름띠는 먼저 수산업을 망가트렸다. 대를 이어 운영해온 굴 양식장이 폐쇄됐다. 미 전역에 공급되는 굴의 67%가 멕시코만에서 생산된다. 루이지애나주는 수산물 생산만으로 매년 24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사태가 악화되며 낚시 관광객의 발길도 뚝 끊겼다. 루이지애나주의 낚시 관광 수입은 연 16억 달러 규모다.

항구 인근 식당 앞에 ‘신선한 새우 팝니다’라는 붉은 배너가 눈에 띄었다. 식당에 들어가 새우가 있느냐고 물었다. 주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없다.”

그는 수족관을 가리켰다. 이끼가 낀 수족관은 물만 찰랑거렸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염이 안 된 지역에서 해산물을 들여다 놔도 팔리지 않는다. 오는 사람도 없고, 혹 있어도 기름 덮인 바다 앞에서 파는 것을 누가 먹겠나?” 주인은 힘없이 말했다.

항구엔 조업 금지 조치로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배들이 줄지어 있다. 할 일이 없어진 어부들이 낮부터 항구에 나와 있다. 그들은 손에 든 맥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운영하던 굴 양식장을 폐쇄했다는 스타커(52)는 “기름 뜬 바다만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며 “기름이 멈춰도 오염된 바다에서 앞으로 10년 이상은 양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양식장에서 일하던 직원들까지 모두 거리에 나앉았다”고 말했다.

BP가 주민에게 피해보상을 하려 하지만 주민들은 달갑지가 않다. BP는 5월 20일까지 6만여 건에 가까운 피해 보상 요구가 접수돼 1억 달러가 넘는 보상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일회성 보상으로 치유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지역 주민 로이드 랜드리(38·낚시 관광업)는 “보상금 몇 푼으로 어디 가서 무엇을 시작할 수 있겠느냐”고 푸념했다.

이 지역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큰 피해를 봤다. 항구에는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항구 주변에는 반쯤 무너진 채 버려진 건물들이 흉물스럽게 늘어서 있다. 구멍이 크게 뚫린 소방서도 그중 하나다. 소방서 앞에는 10여 개의 묘비가 늘어서 있다. 카트리나 때 순직한 소방관들이 잠들어 있다.

카트리나를 겪고도 주민들은 항구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카트리나 때 건물은 무너졌지만 바다는 남아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오히려 카트리나 이후에 어류가 풍부해졌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낚시꾼이 늘면서 생활은 나아졌다.

엠파이어 항 인근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라일 스탁스틸(68)은 “이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바다는 우리에게 먹을 것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돈까지 줬다. 그런 바다마저 없었다면 카트리나가 왔을 때 벌써 이곳을 떠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3대에 걸쳐 낚시로 고기를 잡아 생활해온 지미 로버츠(45)는 “내 인생에서 바다가 없어진다는 것을 상상해보지 못했다. 아버지 때부터 나와 내 아들까지 3대가 살아온 터전이 사라졌다”고 했다. 기름 유출 소식을 듣고 직접 바다로 나가 눈으로 확인한 뒤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그는 지금 생계가 막막하다고 했다.

40시간 안전교육 받아야 자원봉사
엠파이어 항에서 30분 거리인 베니스 항. 멕시코만 해상 유전에 대한 탐사와 시추장비를 공급하는 전진 기지다. 멕시코만 원유 유출 사태 후 작은 마을에는 BP가 만든 1500여 명 수용 규모의 ‘긴급 방제 타운(Responders Village)’이 들어섰다. 이곳에는 철저한 침묵과 통제만 존재했다.

베니스 입구에는 플래퀴민 카운티 셰리프국이 운영하는 비상작전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셰리프국 경관은 “베니스는 상업지구이기 때문에 취재와 사진 촬영에 제약이 따른다”며 “이를 어길 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항구는 조용했다. 방제 트럭과 마을 내에 퍼져 있는 BP에 고용된 직원들을 실어나르는 셔틀만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방제복을 입은 BP 고용 직원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인터뷰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고 짧게 답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BP 고용 직원은 “원유 유출 사태 후 이곳에 수많은 취재진들이 몰리면서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라며 “회사(BP)가 이를 의식하고 직원들의 입단속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항구 인근에 들어선 정부 기관들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어류·야생동물 보호국 관계자는 “아무것도 할 얘기가 없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베니스에서 새우 판매점을 운영하는 베트남계 주민은 “지역 주민들이 원유 유출 사고 뒤 지난 2개월 동안 육체적·정신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며 “하루 빨리 사태가 마무리돼 일상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방제작업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2007년 12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원유 유출 사고 때는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방제작업에 참여했다. 미국은 자원봉사의 나라니 더 많은 사람들이 방제작업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오렌지 비치, 엠파이어 항, 베니스 항 어디서도 자원봉사자는 볼 수 없었다. 실제 앨라배마주에서 자원봉사를 신청한 사람은 고작 1만여 명. 기름 유출의 직접적인 피해지역인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주의 해안선은 1200㎞에 달한다. 기름띠를 방어해야 할 해안선에 비해 자원봉사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원한다고 누구나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다. 우선 위험하다. 멕시코만 기름 유출 지역은 위험한 해안 습지고, 대부분의 기름띠 제거 작업이 바다에서 이뤄진다.

BP 측은 “바다에서 근무가 익숙하거나 특별한 기름 제거 기술을 가진 사람만이 자원봉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정부도 같은 시각이다. 이 때문에 자원봉사에 참여하기 위해선 40시간의 안전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원유 유출 사태를 보는 시각이 문제인 듯했다. 오렌지 비치에서 만난 이 지역 주민은 “BP로 인해 발생한 사태인 만큼 BP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BP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며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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