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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땀 밴'내 만화의 고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5면

1968년 제대해 그 이듬해 결혼하고 몇 년 안됐을 무렵이다. 당시 나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화가냐, 만화가냐.

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화가가 되겠다고 대구 촌놈이 상경해 홍익대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중학교 때 처음 만화책 4권을 출간한 뒤 시작된 만화 와의 악연(?)은 끊어버릴 수가 없었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 주위에서는 미대생이 만화나 끄적거리는 것을 별로 곱게 보지 않았다. 만화 그리는 것은 단지 화가가 되기 위한, 잠시동안의 생활방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이미 만화가였고 내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적잖았다.

그러나 둘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화를 그리면서 만화가이길 거부하는 갈등과 고민을 하다 서울 동대문과 청계천 사이에 있는 한 건물에 코딱지 만한 화실을 열었다.

맨 아래층은 칸칸이 서점이었고 2층은 관리실을 위시해 다방·양복점 등 벌집같은 사무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3층 역시 잡다한 사무실로 빽빽했는데 그 위층에 있던 내 화실은 책상 두 개 놓으면 더 이상 공간이 없을 만큼 좁았다.

이곳에서 동갑내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만화가 한희작형과 2년 간 동고동락을 약속했다. 한형이 내 만화를 그려주는 대신 원고료를 반씩 나눠갖기로 했다. 나는 의뢰가 들어온 작품에 대해 최소한의 작업만 하고 나머지는 한형에게 맡겼다. 한형이 나를 대신하는 동안 나는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바르고 있었다.

처음엔 과연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험기간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만화가로 이끌리는 현실에 "그래, 그림이나 원 없이 그려보자"고 마음을 굳혔다.

옆방은 명랑만화 작가인 신문수·윤승운씨의 공동작업실이었다. 그러다보니 김원빈·고우영·박수동·이우정·이정문·이향원씨 등 동료만화가들은 마치 아지트라도 되는 양 이곳을 찾아왔다. 그러면 만화는 작파하고 시장통 입구에 있는 작은 주점으로 몰려 갔다.

다들 낚시가 취미였던 만큼(지금도 '심수회'란 모임이 있다) 서점 뒤쪽에 있던 제일낚시점도 자주 들렀던 곳 중 하나다. 특히 고서점가를 기웃거리다 『유충열뎐』『사씨남정기』같은 고담책들이라도 발견하는 날이면 마치 세상을 얻은 듯 가슴 설레곤 했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인 데다 밤 11시가 좀 지나면 정문을 닫아버리는 관계로 이를 핑계삼아 밤새 고스톱 치던 기억도 새롭다. 누가 돈이라도 따게되면 해장을 겸해 뒷골목에 있던 대구식 따로국밥집으로 갔다.

그렇게 마시며 즐기며 또 그리며 2년을 보냈다. "후회할 지도 모른다"는 마음속 앙금은 1백호짜리 유화 십여점으로 다 살풀이해 버렸다.

그 뒤부터는 오로지 만화에만 매달렸다. 그것도 SF·복싱·야구·축구·명랑·순정 닥치는 대로 그리던 것을 모두 접고 오직 '바지저고리'만 그렸다. 평화시장 앞골목 새벽 인력시장에 벌춤하니 서있던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어느새 내 그림속 민초들의 삶으로 부활했다. '암행어사 허풍대''바람소리'를 시작으로 '머털도사''덩더꿍''째마리''장독대''객주''임꺽정'등은 그런 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가끔 심란해질 때면 그 작았던 골방과 하얗게 밤을 지새던 그 때를 생각한다. "이왕 만화가가 된다면 내 것을 그리는 만화가가 되겠다"던 그 다짐이 떠오르면 어느새 마음은 가라앉고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던 젊은 날의 초상이 떠올라 남몰래 미소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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