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찍기 22년 … 지금껏 이만한 공포는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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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영화 ‘이끼’는 폐쇄적 공간을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전북 무주에 마을 세트를 짓는 등 미장센(화면 구성)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주연 배우 정재영(왼쪽)과 박해일. [시네마서비스 제공]

의심과 회의의 연속이었다. ‘내가 지금 이 영화를 말이 되게 찍고 있는 건가’ 하는. 촬영 도중 주변 사람들에게 그때까지 찍은 분량을 보여주며 괴롭힌 것도 여러 번이었다. 갓 데뷔한 신인감독,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아니다. 1988년 데뷔해 연출만 22년, 2003년 ‘실미도’로 1000만 관객 시대를 연 ‘백전노장’ 강우석(50) 감독이 신작 ‘이끼’를 찍으며 겪었던 일이다. “나도 모르는 새 내 입에 (수 년째 끊었던) 담배가 물려 있었다”거나 “평생 먹은 두통약보다 이번에 먹은 양이 더 많았다”는 토로는 그간의 마음고생을 압축하는 듯했다. 30일 그를 만났다.

‘이끼’는 인터넷 연재 당시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윤태호 작가의 동명만화가 원작이다. 영상을 압도하는 수준의 과감한 연출과 강렬한 비주얼,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후벼 파는 도발적 메시지에 젊은 독자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원작이 스크린에 옮겨진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연출자와 캐스팅을 두고 거센 논란이 일었다.

‘강철중 : 공공의 적 1-1’ 이후 2년 만에 신작을 내놓은 강우석 감독. [연합뉴스]

“‘훌륭한 원작을 강우석 감독이 연출한다니 실망이다’ 이런 댓글에 상처 안 받을 사람 있을까. (웃음) 나중엔 내 영화가 그렇게 이상했나? 하는 오기로 바뀌었다. 원작을 못 뛰어넘으면 감독으로서 끝장이구나 생각했다.”

영화 빨리 찍고 쉽게 찍고 즐겁게 찍기로 도가 튼 그도 이번엔 전 같지 못했다. “바로 스크린으로 옮기면 될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왜 그 화려하다는 이현세 만화가 영화로 못 옮겨지는지를 절감했다. 젊은 감독 시킬걸, 시작하지 말걸 후회도 했다. 촬영 들어가기 직전 프로듀서에게 ‘지금까지 들어간 제작비가 얼마냐’고 알아보기도 했다. 현장에서 웃음이 나오지가 않았다.” 다 찍고 나서도 생각했다. 이제 영화 다시는 안 찍겠다고.

진통 끝에 태어난 ‘이끼’는 원작과 같으면서 또 다르다. 이제껏 본 ‘강우석 영화’와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또 다르다. ‘이끼’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서울에서 온 류해국(박해일)이 한 외딴 시골 마을의 비밀을 밝혀내는 얘기다. 갈 곳 없는 범죄자들을 갱생시키겠다는 전직 형사이자 마을 이장 천용덕(정재영)과 주민들의 정신적 지도자 류목형(허준호)등 주요 인물도 모두 그대로다. 온 마을 남자가 번갈아 몸을 탐하는 영지(유선)의 캐릭터와 결말은 완전히 달라졌다. 모험이자 승부수다.

“원작의 영지는 등장과 과정은 있는데 퇴장이 명확하지 않았다. 만화는 그럴 수 있다. 영화는 안 된다. 촬영을 몇 번 하고 나서 결말을 정했다. 다들 놀랐다. 유선도 깜짝 놀랐다. 말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대사를 주기로 했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쥔 인물로 바꿨다. 윤태호 작가와 상의하니 ‘마감에 쫓겨서 충분히 숙성시키지 못했던 결말이 아쉬웠었는데, 정말 마음에 든다’고 해 자신감을 더 얻었다.”

대중영화의 문법, 혹은 공식을 꿰뚫는 이른바 ‘강우석 스타일’이 가장 두드러진 대목은 배우 하나하나를 살린 연출일 것이다. 어디 하나 툭 건드리면 무너질 듯한 긴장감 속에서도 웃음이 터지는 역설이 일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우 보는 즐거움을 주려 했다. 인물 하나하나에 공을 많이 들였다. 스릴러의 서스펜스는 상황도 중요하지만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온다. 장면 하나하나로는 공포스러운 게 없는데 쭉 이어놓고 보면 진땀이 배어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기존 내 스타일보다 딱 한 박자 늦추고 인내했다.”

그도 이제 50대다. 터치폰 세대, 트위터 세대의 감성을 읽어내야 하는 영화감독으로선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건 아닐까.

“‘이끼’를 두 번 본 사람이 ‘두 번째 보니 더 새록새록 재미있더라’라고 얘길 해줘 참 기뻤다. ‘투캅스’ 찍고 나서 그런 얘긴 처음 들었다. 17년 만이다. 내가 그 동안 교만했구나 반성했다. ‘공공의 적’ ‘강철중’ 찍으면서 이만하면 재미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강철중’ 하고 나니 안 만들어도 될 영화를 만들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끼’는 창작의 고통을 깨닫게 해준 영화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한 싸움에서 오는 고통 말이다.”

‘이끼’는 그래서 감독 강우석에게 터닝포인트다. 연출작 네 편으로 관객 2317만 여 명을 동원했던 흥행감독, 인생 후반전의 휘슬이 이제 막 울렸다.

기선민 기자



윤태호 웹툰 원작‘이끼’

숨 막히는 전개, 미친 연기 …
휙 지나가는 2시간 38분

시골 한적한 마을에 도회 청년 류해국(박해일)이 내려온다. 마을 주민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허준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마을, 좀 이상하다. 해국이 계속 머무르려는 낌새를 보이자 내쫓지 못해 안달이다. 마을 이장이자 절대권력자 천용덕(정재영)이 그 중심에 있다. 수하인 덕천(유해진), 석만(김상호), 성규(김준배)도 수상하고 가게 여자 영지(유선)도 의심스럽다. 해국은 자신 때문에 지방으로 좌천된 검사 민욱(유준상)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끼’의 마을은 현대사회의 축소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부조리와 불의, 모순이 판치는 대한민국의 미니어처다. 해국은 그 불의의 풍차에 몸을 던지는 돈키호테다. 재탄생한 ‘이끼’는 그런 풍부한 은유를 배경으로 깐 웰메이드 스릴러다. 영지의 캐릭터를 180도 바꿔 ‘복기’할수록 서늘한 결말을 만들었다. 검사와 해국의 관계도 달라졌다. 후반으로 갈수록 둘은 ‘투캅스’의 두 형사처럼 버디가 된다. 원작 팬들의 논란이 예상되는 대표적인 지점이다.

유머 코드가 간간히 섞인 배우들의 연기 합(合)은 2시간 38분이라는 비상업적인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대중적으로 보이게 한다. ‘이장 캐스팅 논란’의 장본인이자 3시간 특수분장을 감수한 정재영은 물론이요, 이장을 항상 편드는 덕천 역의 유해진이 보여주는 소위 ‘미친 연기’는 숨이 막힌다는 상상력 모자란 표현이 머쓱하다. 강 감독에게 “2주의 시간을 달라”고 한 후 제주도 벌판에서 연습하고 돌아온 결과다. 이 장면 대사는 원작자 윤태호 작가가 직접 썼다. 15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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