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9. 이미숙과 강수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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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1988년 속리산에서 '업'을 찍고 있는 강수연씨. 뒷줄 왼쪽부터 손현칠(작고) 촬영기사, 이두용 감독, 차정남(작고) 조명기사.

1984년 영화 제작을 시작할 때 나는 다섯 명의 감독을 찍어 두고 있었다. 임권택.이두용.이장호.배창호.김호선.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의 대표 감독이었다. 이들의 영화만 제작할 수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는 계산이었다. 이 중 김 감독만 빼고는 두 편 이상씩 영화를 함께했다. 김 감독과는 '사의 찬미'를 준비하다 사정이 생겨 중도에 그만뒀다. 초창기엔 특히 이두용 감독과 작품을 많이 했다. '피막' '물레야 물레야' 같은 에로물은 물론이고 액션 영화에도 능한 보기 드문 감독이어서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85년부터 88년까지 '장남'을 시작으로 '돌아이' '뽕' '업' 등 내리 네 편을 제작했으니 그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중에 제작사를 차려 독립하지만 않았다면 인연이 계속되지 않았을까 싶다.

87년 가을 '업'을 만들 때 얘기다. 이 감독은 여주인공으로 이미숙을 기용했다. 당시 이미숙은 '고래사냥''겨울나그네' 등으로 인기 절정기에 있었다. 이 감독과 '뽕'에서 손발을 맞춘 적이 있어 나로서도 대환영이었다.

촬영을 앞두고 제작 발표회를 여는 날이었다. 돼지머리에 1만원짜리 지폐를 꽂고 절까지 다 마쳤는데 이미숙이 나를 잠깐 보자고 했다. "사장님, 저 못 벗겠어요." "무슨 소리야?" "감독님한테 말씀 좀 해주세요." 시나리오에 가슴 노출신이 있는데 그 장면을 못 찍겠다는 거였다. 시나리오를 미리 다 읽어보고 좋다고 해 놓고선 말을 바꾸니 황당했다. 내가 감독을 설득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배우의 인기가 하늘을 찔러도 영화는 감독이 전권을 쥐어야한다는 입장이다. 이 감독을 불렀다. 감독이 그래도 좋다고 하면 따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감독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런데도 이미숙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그 무렵 이미숙과 사귀고 있던 의사 홍모씨를 불렀다. "당장 데리고 나가!" 영문을 모른 채 두리번거리던 홍씨는 내 서슬에 놀라 그를 데리고 황망히 문을 나섰다.

난감했다. 제작발표회도 치르고 이미 언론에 알려지기까지 한 마당에 여주인공이 바뀔 판이니 체면도 말이 아니려니와 영화 이미지도 타격을 입게 됐다. 대타를 찾아야 했다. 이미숙 쪽에서는 어머니가 계속 전화를 해왔다. "잘못했으니 딸애를 설득시켜 다시 출연하도록 하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내 괴퍅한 성질머리에 그런 사정이 통할 리 없었다.

강수연을 수배했다.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고 몸값이 치솟을 때였다. 집으로 전화했더니 없다고 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때라 이 감독과 함께 직접 목동 집까지 찾아갔다. 그러나 자정이 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속이 탄 나는 그가 자주 간다는 사우나에까지 여직원을 보냈지만 허탕이었다. 근처 여관에 방을 잡고는 아버지에게 딸이 들어오면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오전 8시가 돼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허탈감에 젖어 퇴계로 회사로 돌아와 근처 해장국집에서 막 식사를 하려는데 직원이 쫓아왔다. 강수연이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목동으로 직행했다. 몇 시간이나 설득한 끝에 강수연이 승낙을 했다. 20시간에 걸친 숨 가빴던 긴장이 풀리면서 울컥 감격에 젖어 그를 끌어안았다. "수연아, 고맙다 고마워!"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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