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국방 개혁의 원점은 국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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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82년 2월 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는 그 시발점이었다. 당시 군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시스템이 망가졌다. 내부에서 개혁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다. 의회가 군 개혁을 맡아야 한다.” 데이비드 존스 합참의장의 증언은 의회의 국방 개혁에 불을 붙였다. 존스의 겨냥점은 곪을 대로 곪은 각 군 이기주의였다. 자군(自軍) 중심주의는 80년대 군사작전을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80년 이란이 억류한 미국 대사관 직원 구출작전 실패는 대표적이다. 작전에 투입된 각 군 병력은 따로 훈련을 받았고, 이란 내 접선 지점에서 처음 만났다. 명백한 지휘 라인도 없었다. 현장 지휘관이 4명이나 됐다. 철수 과정에선 공군과 해병대 군용기끼리 충돌했다. “이 작전을 계기로 의회에서 각 군은 너무 강하고, 전장에서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늘어났다”고 당시 상원 보좌관이었던 존 햄리 국제전략연구소(CSIS) 소장은 회고한다.

그해 8월, 하원은 니콜스 의원 등의 주도로 합동참모회의(합참) 재조직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상원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과 상원 다수의 공화당 대결 구도 때문이었다. 세력 균형은 85년 골드워터가 상원 군사위원장이 되면서 깨졌다. 골드워터는 64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다. 별명이 ‘미스터 보수주의자’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그는 상원 군사위의 민주당 거물인 샘 넌 상원의원과 손을 잡았다. 초당파 결성은 골드워터-니콜스 법 탄생의 모태였다.

법은 각 군 수뇌를 작전 라인에서 배제하고, 합참의장에게 ‘군사적 보좌(military advice)’를 집중한 것이 골자다. 작전은 대통령→국방장관→지역통합사령관으로 정리됐다. 걸프전 당시 슈워츠코프 사령관은 작전·합동훈련·군수 동원의 전권을 가졌다. 각 군 수뇌는 슈워츠코프의 승인 없이 개입할 수 없었다. 대통령·국방장관에 대한 군사적 보좌도 합참의장에게 전권을 주었다. 42년 합참 창설 이래 회의는 만장일치제로 운영됐다. 각 군 수뇌엔 거부권이 주어졌지만, 합참의장(49년 신설)에겐 표결권도 없었다. 법은 장교들의 인사 관리도 바꿨다. 합동직위 근무를 강화했다. 자군 보직이 아닌 합동직위는 그동안 ‘죽음의 키스’로 통했다. 장교들에게 합동성은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었다.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의회 주도의 국방 개혁 법제화가 몰고 온 파괴력이다. “1775년 군 창설 이래 가장 큰 변화”(레스 애스핀 전 국방장관)라는 평가도 나왔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전면적 군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본지가 제언한 ‘군 개혁 10년 프로그램 짜자’에 대한 반향이 이를 방증한다. 요체는 방법론이다. 정부·군 주도의 개혁안은 내용도 문제려니와 지속성·안정성을 갖기 어렵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국회에 부치더라도 여·야 간 절충으로 속 빈 강정이 되기 십상이다. 노태우 정부의 ‘8·18 계획’(군 구조 개편)과 노무현 정부의 ‘국방개혁 2020’이 걸은 길이다.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이번엔 역발상을 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국회와 민간·군 전문가, 싱크탱크가 주도하고 정부와 조율하는 방식이다. 골드워터-니콜스 법은 좋은 본보기다. 큰 틀에서 보면 문민통제의 원칙과도 부합한다. 곧 천안함 사건 100일을 맞는다. 국회도 추궁의 장에서 정책의 한마당으로 바뀔 때가 됐다. 우리 국회에 골드워터, 니콜스는 나오지 않는가.

오영환 외교안보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