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風 역대 사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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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000년 4월 10일. 16대 총선 투표일을 3일 앞두고 정치권은 충격에 휩싸였다.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전격 발표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호재(好材), 한나라당 등 당시 야 3당은 악재(惡材)로 받아들였다. 민주당은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고 실향민과 부동층을 움직일 변수로 기대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발표 시기를 문제삼으며 "선거용"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총선 결과는 한나라당이 1백33석, 민주당은 1백15석을 얻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의 승리다. 선거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정상회담 발표가 수도권 일부에서만 민주당의 득표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국내 선거에서 남북 문제가 쟁점이 된 경우는 한 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북한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란 얘기도 나온다. 그만큼 단골 메뉴다.

그러나 북풍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엔 북한과의 긴장 국면이 조성되고, 이를 계기로 보수층이 결집하는 양상이었다면 현 정권 출범 이후엔 북한과의 화해·대화 카드로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이 고무되는 경향이 보인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북풍과 득표율의 함수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15대 총선 투표일을 일주일 앞둔 1996년 4월 4일. 북한은 정전(停戰)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5일부터 7일까지 1백~3백명씩의 무장병력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투입해 임시진지 구축작업을 벌였다.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은 유세현장에서 '안정론'을 강조했다. 신한국당은 1백30석, 국민회의는 79석을 얻었다. 야당인 국민회의가 얻은 의석은 예상을 훨씬 밑도는 수치였다. 국민회의는 판문점 사건을 총선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87년 대선 때는 투표일을 17일 앞두고 1백15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한항공기 공중폭파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마유미'로 알려진 폭파범 김현희는 선거 전날 바레인에서 서울로 압송됐다. 집권 민정당 노태우(泰愚)후보의 승리에는 이 사건도 한몫 했다.

이밖에 중부지역당 간첩단 사건(속칭 이선실 간첩사건, 92년 12월 14대 대선),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의 평양발 '김대중 후보 지지'편지 사건(97년 12월 15대 대선) 등이 있었다.

97년 대선에서 국민회의측은 한나라당 정재문(鄭在文)의원의 안병수(安炳洙)북한 조평통 부위원장 접촉설을 제기하며 맞불 작전을 폈다.

김성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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