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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 민주화 → 생명자본 시대로 ‘세살마을’에 한국 80년 미래 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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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해 국내 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는 자녀 수)은 1.15명이었다. 세계 최저 수준이 된 지 오래다. 핵가족화로 인해 육아 책임이 온전히 부모 몫이 되면서 출산을 기쁨보단 부담으로 느끼게 된 탓이 크다. 설령 부모가 돼도 육아 철학이나 자신감이 없어 남 따라하기에 바쁘다.

중앙일보는 새로운 출산·육아 문화 조성을 위해 가천길재단과 서울시가 펼치는 ‘세살마을 운동’에 동참해 연중 기획을 마련했다. 본지 이어령 고문과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오세훈 서울시장의 좌담을 통해 그 의미부터 들어봤다. 좌담은 28일 오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됐다.

오세훈 서울시장=오늘 드디어 ‘세살마을’이 열립니다. 두 분이 오랫동안 노력하신 게 이제야 결실을 보게 됐습니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꼬박 1년을 준비했습니다. 이어령 고문께서 주신 아이디어를 작은 횃불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 자신도 ‘세 살’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공자께서 부모님의 3년상이 너무 길지 않으냐고 묻는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애는 세상에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겨우 부모의 품속을 벗어날 수 있으니,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시간 만큼 부모 곁을 지켜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생후 최소한 3년 동안은 부모나 다른 사람의 보살핌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유일한 생물입니다. 그래서 세살마을이 중요한 겁니다. 앞으로 이 회장은 우리나라 모든 세 살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시는 겁니다. 오 시장께선 아버지가 되는 거고요.

오세훈=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서울의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전국 평균(1.15명)보다 낮은 0.96명이었습니다. 부산에 이어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최저 수준입니다. 그런데 두 분께서 아기 울음소리 나는 사회를 만들고, 그 아이들을 창조적 리더로 키우는 운동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함께 운동을 펼치기로 한 것입니다.

이어령=세살마을은 단순한 출산 장려 캠페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꾸는 범국민운동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80년 뒤의 역사를 책임지기 위해 최소한 세 살까지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자는 겁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은 언어·심리·사회성·예술·건강 등 인간의 모든 슬기가 다 필요한 일입니다. 인간 문명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지요. 국가나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을 이렇게 가천길재단에서 나서 주셨습니다.

이길여=저희 재단엔 대학과 병원이 함께 있어 유기적인 협조가 가능합니다. 길병원에선 많은 신생아와 부모들을 대할 수 있고, 경원대 유아교육과 교수님들이 이번 운동을 준비해주셨습니다. 또 가천의과대의 뇌과학연구소에는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초고장 자기공명영상인 7.0 테슬라(숫자가 클수록 선명) MRI로 태아의 뇌 연구를 하고 있어요.

이어령=세살마을은 생명화 운동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우리 민족을 끌고 온 원동력은 산업화와 민주화였습니다. 이제는 생명화입니다. 생명이 자본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죠. 녹색성장이라든지 저출산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이 회장께서는 우리가 산업화·민주화에 매달릴 때부터 일찍이 생명화의 철학을 펼치신 분 아니십니까. 의료 자체가 생명 사업이고, 더군다나 산부인과 의사로 어린 생명을 무수히 받아내셨으니 말입니다.

이길여=1960, 70년대에는 병원비도 없이 응급상황 때문에 병원에 실려오는 산모들이 많았어요. 그럴 때면 치료비를 받지 않았죠. “어떻게 이 은혜를 갚느냐”고 물으면 “아기를 우리나라의 인재로 잘 키우면 된다”고 했어요. 또 아이를 받을 때면 산모들에게 “조금 있으면 아이가 태어날 텐데 어떤 말을 가장 먼저 해줄지 생각해 보라”고 했어요. 그러면 산모들이 극심한 진통도 잊어버리고 고민하더라고요.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가 아기를 품에 꼭 안고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줬어요. 그때 엄마가 준비했던 말을 하는 거죠. 그러고 나서야 탯줄을 잘랐어요.

이어령=참 좋은 말씀입니다. 산모는 아이를 낳는 동시에 어머니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저출산으로 인해 그런 숭고한 경험의 기회도 줄고 있어요. 저출산은 단순히 노동력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살아온 가족 구성, 문화 구성이 결정적인 손상을 받게 되는 겁니다. 20년만 지나도 삼촌·이모라는 말은 물론 형·아우라는 말도 사라질 수 있어요. 전엔 ‘아이고 내 새끼’ 했다면, 이젠 ‘아이고 우리 새끼’ 하면서 아이를 안아줘야 합니다. 각자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게 아니라 서울시라든지 사회가 나서서 공동 책임으로 아이를 같이 키워주는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오세훈 서울시장(왼쪽부터)이 28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용극장에서 열린 세살마을 운동 발대식에 앞서 이 운동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조용철 기자]

오세훈=저도 그래서 무엇보다 ‘보육천국을 만드는 시장’이 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4년간 보육예산을 두 배 가까이 늘렸고 올해는 복지예산의 약 11%를 보육에 집중 투자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서울형 어린이집 인증사업처럼 시설 위주로 지원을 해왔는데, 앞으로는 집에서 돌보는 아동에 대해서도 지원을 확대하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친정어머니나 친인척이 돌보는 12개월 이하의 영아를 둔 맞벌이 가정을 소득수준에 따라 지원하는 ‘이웃엄마 육아서비스’도 실시할 계획입니다. 전업주부들이 서로 도울 수 있는 ‘육아품앗이방’도 내년부터 시범 운영하겠습니다. 이런 게 모두 말씀하신 육아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길여=일단은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인구 증가 정책은 프랑스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임신 진단을 받으면 국가에서 편지를 보내요. ‘임신을 정말 축하 드립니다. 당신이 낳는 아기는 당신은 물론 우리 지역 사회와 국가가 함께 키우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세살마을에선 편지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백일 때 ‘탄생축하단’이 찾아가거든요.

이어령=탄생축하단으로 활동하는 남녀 대학생들은 인형으로 아이 안는 법까지 다 연습하고 가잖습니까. 저절로 미래의 엄마·아빠 교육이 되는 거죠.

오세훈=장차 부모가 될 젊은이들이 출산과 육아에 대해 미리 공부하는 셈이 되는군요. 서울시에서 하는 예비부모 교육 사업과 맥락이 같으면서도 참신하네요. 서울시도 탄생축하단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습니다.

이어령=그래서 탄생축하단원의 명칭도 ‘내일 아빠’ ‘내일 엄마’ 잖아요. 하하하~. 서울시에서 이 사업에 동참하게 되면 시장께서 출산 가정을 집집마다 방문하시는 셈입니다. 출산 가정에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경우는 많지만 시청에서 가정을 직접 찾아가서 축하해 주는 건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입니다.

이길여=과학적으로 육아법을 정립하는 일도 세살마을의 중심 사업이지요. 요즘은 아기들이 배고파서 울음을 그치지 않는데도 엄마가 그걸 모르고 놀라서 중환자실로 오는 경우가 있어요. 세살마을에서는 아기 울음의 패턴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겁니다. 배고플 때, 기저귀가 젖었을 때, 졸릴 때 각기 울음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분석하는 것이죠.

이어령=전통적인 육아법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요. 우리나라는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가 양육을 맡아주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세대와 신세대의 가치관이나 육아법이 충돌하면서 엄청난 갈등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할머니들은 소화가 잘되라고 아기에게 밥을 씹어서 주는데 엄마들은 그걸 보고 질색을 하잖아요.

이길여=유아교육과와 뇌과학연구소, 종합병원까지 모두 갖춘 가천길재단에서 아기 업는 법, 재우는 법 등 전통 육아법의 장점을 과학적으로 하나씩 증명해 나갈 겁니다.

이어령=사실 제대로 된 육아법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본능과 애정만으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지요. 자동차를 운전하는데도 면허가 필요한데 하물며 부모가 되는데 훈련을 거쳐야지요. (웃으며) 그런데 아이 키우는 면허증은 없잖습니까.

오세훈=그렇지 않아도 서울시에선 매년 1만 명의 예비부모와 영유아·청소년 부모들에게 부모 역할이나 의사소통·학습 코칭 방법들을 알려주는 부모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이길여=탄생축하단에서 모은 데이터가 10년, 20년 쌓이면 부모 교육에도 좋은 자료가 될 겁니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몇 번 안아줬을 때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더라는 결과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어령=세계적으로도 처음 시도하는 일입니다. 앞으로 임신과 출산, 세 살까지의 교육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최고가 될 것입니다. 세살마을이 겉으로 보기에는 육아 문제 같지만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퍼뜨리는 방아쇠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쌓이면 국가와 민족의 경쟁력이 되는 것입니다.

글=김정수·구희령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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