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명 화장품 메이커들 "신제품 성공여부 한국에 물어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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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한국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대단합니다. 10대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이 하다못해 립스틱이라도 꼭 바르고 다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미(美)의식'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세계적인 럭셔리 화장품 메이커인 미국 에스티 로더 그룹 한국 법인인 엘카 코리아의 크리스토퍼 우드 사장은 "한국 여성들의 1인당 화장품 소비량은 미국 다음으로 전세계 2위"라며 "한국 여성들의 남다른 미 의식이 다국적 기업들의 화장품 개발에도 자극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운 피부를 선호하고 가꾸는 전통에다 외적인 미모를 중시하고 경쟁하는 사회풍토가 합해져 한국 여성들이 화장에 유별난 관심을 갖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해 전세계 화장품 시장이 전년 대비 3.9% 성장하는 동안 한국은 두자릿수 성장을 했다. 특히 외국 브랜드의 경우 한국 시장이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높은 성장률을 기록해 본사를 놀라게 만들었다.

세계 최대 화장품 메이커인 프랑스 로레알 그룹의 로레알 코리아는 1993년 법인 설립 후 매년 50% 이상 급성장해 본사에서 주요 전략국가로 대접받고 있다. 엘카 코리아 역시 91년 한국 진출 이후 불과 10여년 만에 에스티 로더 그룹 내에서 일본과 영국 다음가는 큰 시장으로 성장했다.

그러다보니 다국적 화장품 메이커들은 한때 일본의 곁가지 시장 정도로만 여겼던 한국을 주요 테스트 마켓으로 삼고, 신제품 연구단계에서부터 한국 여성들의 남다른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로레알 코리아 이선주 차장은 "한국은 본사에서 모범 사례로 손꼽는 시장"이라면서 "특히 '비오템'등 일부 브랜드의 경우 다른 나라에 출시하기 전에 꼭 한국을 방문할 정도"라고 전했다. 로레알의 럭셔리 브랜드 '랑콤'도 한국에서의 성공사례가 국제 랑콤 미팅에서 빈번하게 논의된다고 한다.

이들이 한국 시장에 주목하는 이유는 시장 규모가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외국계 브랜드 관계자들은 "한국 여성들의 세련된 미적 감각이 연구대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국 여성들의 미적 기준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한국 시장에서 성공한 제품은 다른 시장, 특히 아시아 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얘기다.

한국 여성의 미적 경쟁력이 세계 정상을 지향하는 셈이다.

로레알 그룹은 미국·브라질·일본에 이어 99년 한국에 테스트센터를 설립했다. 일본에 테스트센터가 있었지만,'대륙별로 한 개의 테스트센터만 둔다'는 원칙을 깨고 인접국 한국에 또 하나의 테스트센터를 만든 것은 한국인들의 '정열적인'화장법에 대응하고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테스트센터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여성들은 기초화장에서부터 메이크업·세안에 이르기까지 모든 화장 단계에서 외국 여성들보다 서너배 많은 제품을 동시에 사용한다. 스킨케어의 경우 서양 여성들은 가볍게 로션만 바르지만 한국 여성들은 최소 서너가지를 바른다. 화장을 지울 때도 대개 메이크업 클렌징·폼클렌징·비누 등 보통 세가지 제품을 쓴다.

또 일본인들은 마스카라를 속눈썹에 5~6회만 바르지만, 한국 여성들은 25~30회를 덧칠한다. 이렇게 화장품 사용법이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맞춰 좀더 가벼운 느낌을 주는 방향으로 신제품을 내놓고 있다.

엘카 코리아는 서울에 따로 테스트센터를 두지는 않았지만 에스티 로더·크리니크 등 에스티 로더 그룹 내 모든 브랜드가 5개국 관계자로 이뤄진 자문위원회를 통해 한국 여성들의 특성을 제품에 반영하고 있다. 자문위원회는 한국 외에 미국과 영국·일본·프랑스 관계자로 이뤄져 있다. 또 제품 출시 때마다 한국에서 시제품 테스트를 하기도 한다.

한국 여성들의 유별난 아름다움 추구가 외국 화장품 브랜드의 제품까지 바꿔놓는 셈이다. 이같은 까다롭고 수준 높은 소비자 취향은 ㈜태평양 같은 국내 화장품 업체들에도 세계적 경쟁력을 갖는 도약의 기회가 되고 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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