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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 엄격한 '대쪽 검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이회창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아버지 이홍규(97)라는 게 주변의 일치된 견해다. 이홍규는 자식들에게 "옳은 일을 위해선 목숨을 내놓아도 좋다"고 말해왔다고 한다. '옳은 일을 하라'는 부모는 많아도 '목숨'까지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홍규의 별명은 '대쪽 검사'다. 부전자전인 셈이다.

6·25 직후 구입한 서울 명륜동 방 세칸짜리 한옥에서 살며 환갑 넘어 철봉운동을 시작, 몸이 쇠약해지기 전인 재작년까지 턱걸이 수십번씩을 했다. "백수(百壽)에 팔굽혀펴기 백번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홍규는 자식들에게 엄격했다. 의과대학생이던 큰 아들 이회정에게 회초리를 든 적도 있다고 한다. 이회창의 친구 배도(효성물산 고문)는 "이회창의 명륜동 집에 탁구대가 있어 자주 놀러갔지만 옹이 있으면 겁이 나 숨죽여 얘기만 했다"고 기억한다. 경기고 친구 최돈웅(한나라당 의원)은 "조금만 떠들라치면 밖에서 '예습을 하든지, 복습을 하든지'하는 호통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이회창이 35세 때인 1970년 미국으로 1년간 연수를 떠났을 때다. 6개월을 홀로 보낸 이회창은 아버지에게 편지로 '남은 6개월을 집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나중에 갚을테니 체재비용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홍규의 회답은 '연수를 갔으면 열심히 공부해라. 집사람이 없는 게 더 좋다'는 꾸지람이었다.

이홍규를 둘러싼 논란도 있다. 여권이 제기한 '친일'시비다. 이홍규가 검사가 된 것은 45년. 일제치하 15년간 황해도·전라도에서 검찰 서기를 한 뒤다. 민주당에선 "일제 말 검찰 서기를 했다면 독립투사를 탄압한 게 뻔하다"고 주장한다. 또 "30년부터 40년까지 10급에서 7급으로 고속 승진했는데 친일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이에 대해 장남 이회정은 "서기는 문서작성·서류송달·금품징수 사무를 봤다. 친일했다면 피해자가 있을 것 아니냐. 서기와 사법경찰인 헌병보를 착각한 것 아니냐"고 했다. 이회창의 집안사정을 잘 아는 서정우(徐廷友)변호사는 "해방 뒤 미군정청은 법원장·검사장이 추천한 서기를 대상으로 특임시험을 봐 판·검사로 임명했다"며 "친일했으면 추천을 받았겠으며, 서기로 근무했던 광주지검에서 검사생활을 했는데 주변에서 가만히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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