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컨베이어 벨트가 달린 수확기가 농장 노동자들이 손으로딴 파인애플을 모으고 있다.
▶ 트럭에 실려 패킹하우스로 옮겨진 파인애플을 노동자들이 크기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다국적 농산물 메이저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고약하다. 플랜테이션(plantation)이란 단어 자체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서양인들이 자본.기술을 제공하면서 현지 원주민.이주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 온 식민지 시절의 가혹한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다국적 신선 과일 기업들의 플랜테이션이 급변하고 있다. 전 세계의 소비자를 상대로 한 업체인 만큼 19세기의 어두운 이미지로는 소비자의 외면을 받아 더 이상 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력 착취의 상징이던 플랜테이션에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연구개발을 강화하고, 생산에서 물류까지 철저한 품질관리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9일 방문한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남동쪽의 국제 청과기업인 델몬트의 바나나 플랜테이션인 타데코. 9000㏊(약 2723만평)의 광활한 이 농장에선 하루 6만~7만 상자의 바나나를 생산한다. 성수기인 3~5월에는 하루 생산량이 9만 상자를 넘는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8000여명에 이른다.
바나나 수확은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할 수밖에 없다. 손상되기 쉬운 데다 기계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차량으로 3시간가량 걸리는 곳에 위치한 다부코 파인애플 플랜테이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단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땅에 내려지면 자동화.기계화된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수확한 바나나는 모노레일을 통해 농장 내의 16개 패킹하우스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중량검사를 거치는데, 검사대는 필리핀 지사의 컴퓨터에 연결돼 실시간으로 모든 자료가 공유된다. 중량검사를 마친 바나나는 지하수로 2~3차례 씻어낸 뒤 물기를 깨끗이 닦아낸다. 후안 카를로스 아레돈도 바나나 생산 책임자는 "한국에선 바나나를 농약으로 씻는다고 잘못 알려져 현지 농장 관계자가 한국 바이어 앞에서 이 지하수를 마시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파인애플 수확과정에선 대형 수확기가 다량으로 집화한다. 파인애플 패킹하우스의 분류.포장.보관 등 전 과정이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돼 있다. 이후 까다로운 품질 검사가 기다리고 있다.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는 바나나나 파인애플은 가차없이 버려졌다.
품질검사가 끝나면 곧바로 프리쿨링을 하는데, 뜨거운 햇볕 아래 수확되기 때문에 과일의 온도가 높아 강제로 열을 식히는 과정이다. 파인애플의 경우 7도, 바나나는 14도까지 식힌다.
이후 냉장 컨테이너에 실려 델몬트 플랜테이션에서 한시간 안 거리인 부두로 옮겨져 세계 각지로 곧바로 수송된다.
플랜테이션들은 이미지 변신을 위해 친환경 재배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타데코 바나나 농장에선 천연물질을 이용한 친환경 병충해 방지 시스템을 운용 중이다. 델몬트는 독일 본 대학과 함께 신품종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또 다른 다국적 청과회사 돌도 필리핀에 아시아 연구개발센터를 개설, 세계 최대의 바나나 종자 배양소를 운영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둘러본 플랜테이션들은 더 이상 착취의 현장이 아니었다. 다른 열대지역과 달리 필리핀에선 아동 고용이 철저히 금지돼 있고 농장 노동자 가족을 위한 학교.병원.탁아시설.체육관.가라오케 등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모두 델몬트가 직접 운영하며 무료다. 루이스 아바라도 파인애플 생산 책임자는 "실업률이 높은 필리핀에서는 플랜테이션에 취업하는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현지 최저 임금에 비해 델몬트 농장의 노동자는 33% 정도를 더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필리핀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가 되면 2~5개월치 임금을 보너스로 준다고 한다.
경쟁회사인 돌도 필리핀에서 현지 근로자를 위한 '카이비건'이란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필리핀 타갈로그어로 친구를 뜻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돌은 장학금.정수사업.아동고용 금지.주택.의료시설 등 활발한 환경 개선사업을 벌이고 있다.
민다나오=이철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