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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4> 제101화 우리서로섬기며살자 : 33.가족들을 전도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귀국 직후 아내의 거주허가를 받으러 가느라 시청앞을 지나치는데 누군가가 "헤이 빌리 킴!"이라고 불렀다. 잭 베스킨이라는 성서침례회 선교사였다. 미국에서 신문을 통해 나의 얼굴을 자주 봐서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단체를 등록하는 요령을 가르쳐주었고 여러 선교사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 선교사들을 통해 내가 나갈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 외무부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출입국 관리 담당을 찾았는데 한 직원이 벌떡 일어서더니 "장환이!"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중학교 동창인 안세훈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거주허가도 쉽게 받고 자동차 통관도 쉽게 끝냈다. 인천세관의 총무과장이 마침 안세훈의 친구 형이었던 것이다.

안세훈은 그날 우리 부부를 데리고 사무실 옆 동림빌딩 스카이라운지 양식당에서 점심을 사주었다. 아내는 당시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매일 사과와 센베이라는 과자로 끼니를 때우던 터였다. 오랜만에 먹는 양식이 너무나 맛있어 둘이 접시를 깨끗이 비우자 안세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안세훈은 지금도 나를 만나면 내 아내가 한국으로 시집 온 것은 지금 한국 여자가 아프리카로 시집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아내와 함께 나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부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내의 운전기사쯤으로 여겨 은근히 속이 상했다. 너무나 가난했던 1960년 초였으니 미국사람에 대한 선망이 대단했다. 아내에게 무조건 호의를 베풀려는 사람도 많았다. 한번은 미국 친구가 선교비로 보내 준 송금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려고 은행을 찾았다. 돈이 급히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은행원은 2개월 뒤 추심이 끝나야 현금을 지급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정해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아내를 내세웠더니 그 자리에서 현금이 나왔다.

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환멸감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사대주의에 마음이 슬펐다. 좋지 않은 풍조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조국의 복음화를 서둘러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아내를 만나려고 고아원 원장이나 구호단체 사람들이 매일 우리 집을 찾아왔다. 우리가 부자라는 헛소문이 난 데다 미국 사람이니 어떻게 다리를 놔서 지원금을 받도록 해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아내가 한국실정을 몰라 이용당할 수 있기에 나는 접촉을 일절 차단했다. 2000년 12월 우리 부부가 KBS-TV '아침 마당'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아내가 한국에 온지 40년 만에 처음으로 TV에 얼굴을 비춘 것이다.

내가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YFC(10대선교회) 결성이었다. 아내는 김추리(金秋利)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렸으나 국적을 바꾸지는 않았다. 국적을 바꿀 경우 부모·형제가 미국에 있는 아내의 발목을 잡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잖아도 나는 비자를 얻지 못해 장인어른이 타계했을 때도 미국을 찾지 못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짐도 찾아오고 아내에 대한 수속도 마치고 이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됐다. 전도의 1차 표적은 우리 가족이었다. 그때 우리 집은 여전히 터줏자리를 3개 두고 토속신앙을 믿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매일 정한수를 떠놓고 빌었다. 큰 형님은 내가 돌아오자마자 나를 아버지 산소로 데리고 갔다. 형수가 산소 앞에 술과 과일을 차리자 형이 나에게 절을 하라고 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기독교와 추도예배에 대해 설명을 하고 그냥 기도만 드리겠다고 말하자 큰형님의 얼굴이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굳어졌다. 두 형은 내가 아버지뻘인 큰 형님에게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는 놀란 것 같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동생을 야단칠 수도 없어서인지 큰형님이 나에게 절을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성묘는 서먹서먹하게 끝나고 말았다.

당시 직장을 잃고 방황하고 있던 셋째형이 예수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 그러자 다른 가족도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제삿날에 나는 큰형님께 "한번만 추도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다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고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인상적인 일들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며느리들이 가장 먼저 예수를 믿겠다고 나섰다. 음식준비 하느라 고생 안해도 되고 제사 후 남자들이 술자리를 갖는 일이 사라져 너무 좋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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