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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탱크 최경주 <3> - "나의 빈잔을 채워 주~" 노래방서 즉석 청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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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외로운 사람끼리/아~ 만나서 그렇게 또 정이 들고/어차피 인생은 빈 술잔 들고 취하는 것/그대여 나머지 설움은 나의 빈 잔에 채워 주'.

1995년 3월 서울의 한 노래방.

최경주(32)는 지금의 부인이 된 김현정(31)씨를 앞에 앉혀놓고 남진의 '빈 잔'을 구성지게 불렀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청혼을 했다.

"나의 빈 잔을 채워주시오.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소."

서울 한서고를 졸업한 최경주는 당시 이렇다 할 성적도 내지 못하고, 장래도 불투명한 데뷔 3년차의 평범한 프로골퍼였다. 더구나 그 시절엔 골프가 대중화하지 않아 프로골퍼는 환영받을 만한 신랑감도 아니었다.

반면 김씨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재원. 처가의 반대가 심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김씨는 최경주의 진심어린 청혼을 받아들였다.

"노래를 굉장히 잘하더라고요. 평소 무섭고 날카롭게 생겼다고 생각해 왔는데, 초조하게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때 그 모습은 그렇게 순진해 보일 수가 없었어요."

최경주는 같은해 5월 88골프장에서 열린 팬텀 오픈에서 마침내 프로 데뷔 후 첫 승을 거뒀다. 힘겹게 처가의 결혼 승낙을 받아낸 최경주는 그해 12월 결혼에 골인했다.

최경주가 미국프로골프협회(PGA) 투어 정상에 오르기까지에는 부인 김현정씨의 내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나는 가방끈이 짧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다. 영어도 제법 한다"며 김씨에 대한 고마움과 믿음을 표한다.

그가 김씨를 처음 만난 것은 93년 1월. 인천의 한 골프연습장에서 레슨 프로로 일하던 중 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만났다. 당시 최경주는 교회에는 나갔지만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이에 비해 김씨는 신앙심이 매우 깊었다.

김씨는 신혼 초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수입의 10%를 십일조로 냈다. 그는 이를 못마땅해 했다. 김씨가 기도를 할 때 소파에 누워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김씨는 이런 남편을 계속 교회로 이끌었다. 시간이 흐르자 최경주도 달라졌다.

97년 아스트라컵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선수권에서 우승한 그는 "대회 전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했다. 이제 진짜 신자가 된 것 같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미국 무대에 진출한 뒤에도 최경주 부부는 예배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투어에 참가하느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닐 때에도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은 한인 교회였다. 차 안에서도 테이프를 틀어놓고 설교를 들었고, 대회 출전 때문에 주일 예배를 걸러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수요 예배에 참석했다.

"우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 실력만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내 실력만큼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최경주는 컴팩 클래식에서 우승한 뒤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부인 김씨의 내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치찌개와 제육볶음 등 얼큰한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최경주는 대회 때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을 했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 김씨는 집에 있을 때면 매일 매운 반찬을 한가지 이상 만들어 내놓았다. 대회에 출전할 때면 경기장 근처의 한국 식당을 찾아내 하루에 한끼는 반드시 한식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최경주는 컴팩 클래식 우승 직후 김씨를 꼭 껴안고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해서 우승을 하는거구먼. 여보,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소."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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