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변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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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이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 직전에 불참을 통보한 것은 통탄할 일이지만 북한의 그런 결정의 원인(遠因)이 부시 정부의 근본적인 대북 강경노선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북한의 남북대화 보이콧까지 미국 탓이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평양의 분위기로 봐 분명히 그렇다.

평양쪽 사정을 보자. 1998년에 만든 북한의 새헌법은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의 정치적 권위의 바탕을 노동당에서 군부로 바꿔 놓았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셀릭 해리슨은 그런 변화를 "무혈 군사쿠데타"라고 말한다. 정치적인 영향력에서 군부가 노동당을 압도하고 金위원장도 군사위원장으로 북한을 통치한다.

金위원장은 군부를 앞세운 선군(先軍)정책으로 한편으로는 군부를 확고하게 장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를 개혁·개방의 지지·동조세력으로 만들고 있다. 지지난해 가을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조명록 장군을 워싱턴에 보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궁지에 몰린 북한 개혁파

북한은 김일성(金日成)주석이 생존 중이던 91년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노선투쟁에서 개혁파가 승리했다. 그래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한 핵시설 사찰을 받아들였다. 93, 94년의 핵위기는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의 반발에서 발단됐고, 94년 제네바합의는 개혁파의 조건부 승리였다. 여기에서 조건은 미국이 경수로 건설, 경제제재 해제, 관계정상화 약속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워싱턴 분위기는 어떤가.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제네바합의를 지키지 않는 쪽은 미국이다. 제네바합의 제2항에서 북한과 미국은 6개월 안에 교역과 투자의 장애물을 제거하자고 합의했다. 그러나 클린턴 정부는 6년이 지난 2000년에 겨우 경제제재를 부분적으로 해제하는 데 그쳤다.

부시 정부에 들어와 미국의 입장은 크게 후퇴했다. 부시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는 관심이 없이 핵·미사일·테러 같은 개별적인 문제나 해결하겠다는 자세다. 그리고 북한이 언젠가는 붕괴될 체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평양과 워싱턴의 이런 사정을 묶어 생각하면 남북경협 회의가 무산된 배경이 이해된다. 북한에서 조지 부시는 증오의 대상이다. 개혁파는 부시 때문에 북·미관계 개선을 통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아 빈사상태의 경제를 살리는 계획에 차질이 온 것을 절치부심할 것이다. 개혁반대 세력은 "그것 봐. 내가 뭐랬어"라고 남북, 북·미대화 재개를 견제할 것이다.

북한이 임동원(東源)특사를 받아들이고 다시 미국의 특사를 초청한 데는 분명히 부시 정부의 채찍이 작용했다. 다만 최성홍(崔成泓)외교부장관의 실수는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북한 강경파들에게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갈망한다. 클린턴이 경제제재를 부분적으로 해제했는 데도 유럽국가·호주·캐나다와 외교관계 수립의 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한 북한은 아마도 그들의 반미수사(修辭)와는 달리 국제정치에서의 미국의 절대적인 입김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그럴수록 개혁파는 남북,북·미대화에 더 매달리고 반대파는 더 저항할 것이다.

클린턴式 포용 나섰으면

金위원장이 군부를 장악했지만 경제적인 유인책의 대가로 안보분야에서 너무 많이 양보해 북한의 생존전략을 위협하는 것을 경계하는 일부 군부의 대화 견제는 짐작할 수 있다. 북한도 일사불란하지 않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진영은 북한이 변한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미국이다. 클린턴의 포용정책도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시작됐다. 클린턴 정부의 입장이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하는 쪽으로 바뀐 것도 99년 북한을 방문한 윌리엄 페리가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뒤다.

부시 정부는 다시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관심이 없다는 쪽으로 후퇴했다. 부시 정부가 이런 태도를 지키는 한 북한은 앞으로도 자주 약속된 희의장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북한보다 부시 정부의 대북자세의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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