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감정 완벽 통제 '시나리오 닥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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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스티븐 소더버그의 '에린 브로코비치' 대본을 쓴 사람은 수재너 그랜트다. 그러나 시나리오 완성품을 내놓은 사람은 할리우드의 일급 시나리오 닥터인 리처드 라그레이브니스다.

그의 1년 수입은 6백만달러(약 78억원)를 넘는다. '피셔 킹''매디슨 카운티의 다리''호스 휘스퍼러' 등은 그가 이름을 걸고 직접 썼으며, 그밖의 많은 영화에는 시나리오 닥터로 참여한다.

짧은 기간 일해 줘도 보수는 원작자에 뒤지지 않는다.

할리우드는 신인 작가를 믿지 않는다. 유통되는 영화의 시나리오는 반드시 전문 작가의 손을 거쳐야 한다고 믿는다.

대학생 작가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로 하루 아침에 1백만달러를 받고 스튜디오에 원고를 파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러나 스튜디오는 절대로 그것을 그대로 영화화하지 않는다. 신인 작가의 원본은 라그레이브니스나 데이비드 마멧 같은 전문 작가의 손질을 거쳐 블록버스터급의 시나리오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는 관객의 정서적 경험을 통제하는 과학이다. 어쩌면 의학이나 공학과도 같다. 중병에 걸린 환자를 완치하려면 노련한 전문의가 필요하듯, 거대 영화 프로젝트에는 경험이 풍부한 시나리오 의사가 동원된다.

이 전문가들은 어떤 구조와 어떤 장면, 그리고 어떤 대사가 관객을 사로잡는지를 훤하게 꿰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많은 관객을 모으는 영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할리우드는 컴퓨터 그래픽이나 특수효과 기술만으로는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난해 미국작가협회가 파업으로 으름장을 놓았을 때 거대 스튜디오 간부들이 비굴할 정도로 끈질기게 협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육상효 감독

<남가주대 대학원 시나리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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