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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탱크 <1> - 32세'완도 촌놈' 美 그린 정상 우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우승을 확정한 뒤 부인 김현정(31)씨를 끌어안은 '완도 촌놈' 최경주(32·슈페리어)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이 감정이 북받쳐 올랐던 모양이다. 아는 사람은 안다. 그 눈물은 남몰래 흘린 숱한 땀의 결정체라는 것을-.

"2000년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 나는 10년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웠다. 목표가 좀더 일찍 달성됐지만 앞으로 더 많은 승리를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최경주는 벌써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경주는 재작년 훌쩍 비행기를 타고 낯설고 물선 미국으로 떠났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황무지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최경주는 국내 최고의 골퍼였다. 1996, 97년 연속으로 상금 랭킹 1위에 올랐고, 국내 무대에서만 9승을 거뒀으며,99년 일본프로골프협회(JPGA)무대에 진출해서도 2승을 따냈다. 일본과 국내 투어에만 전념해도 최소한 수억원의 상금이 굴러떨어지는 안정된 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미프로골프협회(PGA) 투어 퀄리파잉 스쿨을 거쳐 미국 무대를 노크했다.

우려했던 대로 데뷔 첫해는 험난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말도 안통하는 데다 지리를 잘 몰라 대회가 열리는 골프장에 30~40분씩 지각하기가 일쑤였다. 생판 모르는 골프장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기'만큼이나 어려웠다.

모텔에서 새우잠을 자며 미국 전역을 오가는 유랑 생활이 계속됐다. 아껴 쓴다고 해도 한해 투어에 참가하는 데만 20만달러 이상이 들었다. 집을 처음 정했던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대륙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텍사스 휴스턴으로 옮긴 것도 교통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육체적인 피로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국내 무대에선 장타자라고 자부했지만 내로라 하는 외국의 선수들과 맞부닥치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갤러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연습할 때면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했다.

어떤 때는 드라이버샷이 타이거 우즈(미국)가 롱 아이언으로 친 공보다 덜 나가기도 했다.

투어 첫해 성적은 상금 랭킹 1백34위(30만5천7백45달러).

'체격 조건에서 달리기 때문에 남자는 안될 것'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데뷔 첫해에 부진한 성적을 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이대로 주저앉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상금 랭킹이 1백25위 내에 들지 못한 탓으로 이듬해 PGA 투어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지옥의 레이스'로 불리는 퀄리파잉 스쿨을 거쳐야 했다. 그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고 골프채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연습은 첫해와 달랐다. 무턱대고 훈련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부는 방향이라든지, 그린이 얼마나 빠른지 등 외부 조건을 염두에 둔 훈련을 한 것이었다. PGA 첫해 경험의 산물이었다.

다른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담은 비디오도 모니터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장타는 기본이고 정확도가 생명'이라는 것이었다. 한 수준 높은 골프에 눈을 뜨게 된 최경주는 지난해 '톱10'에 다섯차례나 진입했다.

상금 랭킹을 65위(80만3백26달러)로 끌어올리면서 올 시즌 전경기 출전권(풀시드)도 따냈다. 그리고 마침내 컴팩 클래식에서 그는 세계를 품에 안았다.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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