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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냄새 싹 걷어내고 사람의 향기 담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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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MBC ‘로드 넘버원’의 소지섭과 김하늘

TV 드라마의 본질은 오락이다. 막장이든, 순정이든, 시청자들을 재미있게 해줘야 한다는 게 존재 이유다.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이 그 오락물의 소재로 전면 부상했다. 지난 19일과 23일 각각 처음 방영한 KBS-1TV ‘전우’와 MBC 수목극 ‘로드넘버원’. 모두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20부작 드라마다. 이들 드라마는 해마다 6ㆍ25에 맞춰 편성됐던 캘린더성 특집 프로그램이 아니다. 황금시간대에 자리 잡은 각 방송사의 야심작들이다.

전쟁 발발 60주년. 그동안 한국전쟁은 오락물의 소재가 되기에 너무 아프고 껄끄러운 존재였다. 형제와 친구ㆍ이웃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비극의 후유증을 모두가 함께 앓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고, 피붙이를 잃었고, 삶의 터전이 망가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겪었던, 혹 운이 좋아 나는 피했을지 몰라도 한 다리 건너 짚어보면 가까운 누군가가 겪었던 비극이다. 게다가 그 비극은 과거형이 아니었다. 냉전시대를 거치며 시시때때로 전쟁 재발의 공포가 밀려오곤 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 6ㆍ25 장면을 남의 일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바라볼 수 없는 이유였다. 할리우드 전쟁영화처럼 아군을 무조건 선으로, 적군을 무조건 악으로 규정해 애국심을 고취하기에도 한국전쟁은 적당한 소재가 못 됐다. ‘동족상잔’이란 게 그만큼 특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위 ‘드라마 공화국’이라 불리는 우리 방송환경에서도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드라마는 섣불리 등장하지 못했다. 1970~80년대 방영된 ‘전우’가 전쟁 드라마란 장르를 열었을 뿐이다. 철저한 반공 이데올로기, 국군의 일방적인 영웅담을 펼쳐 보이는 게 그 시대 ‘전우’의 역할이었다.

그렇게 60년이 지났다. 60갑자(甲子)가 다시 돌아오는 세월이다. 실감나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쟁의 참상을 시청자들이 이젠 ‘쿨’하게 즐길 수 있게 된 걸까. KBS-1TV ‘전우’와 MBC ‘로드 넘버원’ 모두 “전투 장면을 장대한 스케일과 생생한 디테일로 전달할 것”이라며 출사표를 던졌다. 스펙터클이 강조되다 보니 두 드라마의 제작비는 블록버스터급으로 올라갔다. ‘전우’는 회당 4억원, 총 80억원이 투입됐고, 사전제작으로 만든 ‘로드 넘버원’에는 총 130억원이 들었다.

뚜껑을 연 두 드라마는 ‘실감나는 전투 장면’이란 점에선 일단 합격점을 받았다. ‘전우’는 1회 초반 20분을 전투 장면으로 채웠다. 레드원 카메라를 이용해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의 분위기를 살렸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대규모 폭발 신과 총격 신을 웅장하게 묘사했다. 전투기 폭격으로 북한군을 초토화시키는 평양 시가전 장면도 볼 만했다. ‘로드 넘버원’ 역시 빨치산 토벌 장면과 북한군 기갑부대의 등장 등 인상적인 전투 상황을 드라마 초반에 배치했다. 한국전쟁 당시 실제 쓰였던 북한군의 T-34 탱크도 등장해 현실감을 더했다. 제작진이 1억원을 들여 똑같이 재현해낸 드라마 소품이다.

웅장한 화면에 비해 스토리는 아기자기하게 흘렀다. 이념대립 등 정치적인 색깔은 모두 걷어냈다.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등에도 관심없다. 오직 초점을 맞춘 부분은 ‘사람’이다. 전쟁 상황을 휴머니즘과 결합시켜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자극했다. ‘전우’에서는 군인들 사이의 동료애가, ‘로드 넘버원’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이 주제다. 전쟁이란 상황은 그 사랑을 극적으로 증폭시키는 장치일 뿐이다.

사실 이런 구도는 이미 영화판에서 시도해 성공을 거둔 바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형제간의 끈끈한 우애를 그렸고,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한 군인들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또 ‘웰컴 투 동막골’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화해와 평화의 가치를 강조했다. 정치색 배제는 이들 영화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밑거름이 됐다. 다양한 성향의 관객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어서다.

두 드라마 ‘전우’와 ‘로드 넘버원’의 휴머니즘도 꽤 호소력 있다. “다 죽었음매. 한 놈은 징용 나가서, 한 놈은 학도병 나가서….” ‘전우’ 1회에 등장한 한 촌로의 말이었다. 압록강가에 사는 그 노인은 한 손엔 태극기를, 또 한 손엔 인공기를 든 채 진군한 국군을 맞았다. 두 아들을 잃고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 국군이든, 인민군이든 무슨 상관이랴. 시청자들까지 단박에 몰입시키는 장면이다. ‘로드 넘버원’에서도 이념문제는 사소하게 다뤄졌다. 남로당원인 여주인공 수연(김하늘). “독서모임인 줄 알고…”가 그가 남로당원이 된 이유였으니, 이념 논란을 가볍게 넘길 장치를 초반부터 깔아놓은 셈이다.

‘로드 넘버원’에선 이데올로기보다 소지섭ㆍ윤계상ㆍ김하늘, 세 청춘 스타의 삼각관계가 주된 갈등요소다. 이들의 사랑놀음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 얼마나 설득력 있게 녹여 넣을지가 ‘로드 넘버원’의 과제다.

글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사진 KBS·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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