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0>제101화우리서로섬기며살자 29.은인왈도예거장로

중앙일보

입력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칼 파워스씨의 부담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파워스씨에게 공부 또한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고 허락을 받아냈다. 나는 어떤 일이든지 반드시 그와 상의하고 그의 허락을 얻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 거의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아 파워스씨도 썩 만족해했다. 나는 친구인 왈리에게 여름방학 동안 그의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친구의 아버지 왈도 예거 장로는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닭과 칠면조를 가공하는 코트랜드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예거 장로는 미국기독인실업인협회 회장을 3년간 역임했을 정도로 인정받는 실업인이면서 믿음이 좋은 분이었다.

예거 장로는 나의 아르바이트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두 아들에게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야구 구경도 같이 가고, 차별을 하지 않고 함께 잘 지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나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사장님 댁에서 그의 아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그러한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다. 하루에 수천마리의 닭이 자동으로 포장까지 된 다음 냉동처리 되었지만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공정도 많았다. 달걀의 크기를 분류해서 포장을 하고 썩은 달걀을 골라내는 일도 있었다. 나는 3년간 여름방학 때마다 그 일을 해서 지금도 썩은 달걀 고르는 일에 일가견이 있다.

체구가 작은 내가 미국인 일꾼들에 뒤지지 않으려면 그들보다 두 배는 일해야 했다. 그래도 내가 맡은 몫을 다 하지 못하면 출퇴근 카드에 도장을 찍어 놓고 밤늦게 공장에 남아 마무리를 지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예거 부인의 집안 일을 도와주었다. 아무도 나에게 숙식비를 내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주급을 받으면 10달러를 예거 부인에게 하숙비로 냈다. 나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예거 장로는 나의 그런 태도를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있었다.

예거 장로 부부는 정직하고 검소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하이오주에서 손꼽을 정도의 부자였으나 신발 한 켤레를 10년씩 신었다. 자동차도 굴러가지 않을 때까지 탔다. 예거 부인은 일하는 사람을 두지 않고 혼자 집안 일을 다했다. 남편과 아들 둘, 나까지 모두 4명의 와이셔츠 40장을 주말마다 다리느라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세탁소에 맡기지 않았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갈 때면 예거 부인은 내가 냈던 1백20달러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사고방식이 미국화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나의 경우는 성서에 입각한 미국인들의 보편적인 삶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크리스천이었고 그들에겐 성서에 입각한 신앙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직하고 남을 해치지 않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같이 건실한 생활태도는 나에게 큰 교훈이 되어 이후 내 삶의 좌표가 되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예거 장로는 나를 위해 아주 큰 선물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빌리, 자네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데 허락해주겠나? 내가 자네를 위해 우리 지역 실업인들과 힘을 합쳐 세계기독봉사회를 조직했네. 한국으로 가서 청소년 선교를 하려면 실탄이 있어야지. 내가 미국에서 공급해주겠네. 빌리와 트루디를 우리 기독봉사회의 선교사로 임명하고 싶네."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 예거 장로는 아버지로서, 그리고 세계기독봉사회 회장으로서의 역할을 너무도 충실히 이행했다. 우리에게 선교비를 보내주고 한국의 청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면 기꺼이 자기 집에서 묵게 하고 학비를 지원했다. 그래서 나보다도 예거 장로를 더 큰 은인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한국에 여러 명 있다.

2000년 4월,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예거 장로는 스무 번 넘게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의 선교활동을 지원했다. 특히 열악한 환경의 한국으로 시집 온 트루디를 위해 마치 친정아버지처럼 먹을 것을 잔뜩 싸들고 왔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파워스씨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예거 장로가 나를 위해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