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無책임제'로 표류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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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참으로 답답한,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대통령 무책임제'를 아무 불평없이 유지해야만 하는가? 우리 국민 모두의 운명을, 그리고 나라의 앞날을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는 한 사람에게 맡기는 현행 제도를 다음 선거 후에도 무한정 끌고 갈 것인가?

대통령후보 경선의 열기와 바람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인물만을 탓하고 제도적 결함은 외면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이른바 이념 논쟁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없지 않으나 '대통령 무책임제'의 관행을 깨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은 한결같이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공언했고 또 그런 의지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지?

제왕적 대통령제 폐단 되풀이

현행 헌법이나 관행으로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임기가 끝난 후 역사에 대한 책임은 질 수 있겠지만 임기 중에는, 특히 임기 후반에는 '대통령 무책임제'의 관행에 실려 표류하는 길밖에 없다.

이렇듯 잘못된 관행을 이번 선거에서 바로잡지 못한다면 누가 12월 대선에서 당선이 되든 '대통령 무책임제'에 따른 딱한 사정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상황과 같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처럼 딱한 지경에 이른 데는 국민들이 지닌 모순된 바람에도 그 원인이 있다. 우리 국민은 한편으로는 제왕적 대통령을 싫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모순된 생각을 지니고 있다.

제왕이란 아무에게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무소불위(無所爲)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민주국가의 시민이 제왕적 대통령을 원치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대신 국민이 바라는 '강력한 지도자'란 과연 어떤 인물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껏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준비하지 못한 데서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강력한 지도자란 두가지 덕목을 갖춰야 한다. 첫째는 국가적 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을 늘릴 수 있는 능력이며, 둘째는 정부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확실히 질 수 있는 자세다.

'정치적 힘'이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며 늘 수도 있고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신축성은 현대적 금융제도가 돈의 효용가치를 늘리는 것에 비유해 이해할 수 있다. 1백만원을 가진 사람이 이를 은행에 예금하고 1백만원이 필요한 사람이 은행으로부터 이를 대출받는다면 예금주도 1백만원, 차용주도 1백만원을 각각 이용하게 돼 효용가치는 세배로 증대한 3백만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권력을 혼자서 움켜쥐고 아무에게도 나눠주지 않을 때 '정치적 힘'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권력의 독점이 그를 강력한 지도자처럼 보이게 할지는 몰라도 국가적 과제를 처리하는 '정치적 힘'은 한계에 부닥치게 될 뿐이며, 그와는 반대로 힘을 적절히 나눠 행사하면 '정치적 힘'은 배로 증대돼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중국의 장쩌민(江澤民)주석이 주룽지(朱鎔基)총리에게 힘을 나눠주었다고 江주석의 권력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며 중국 정부의 국가운영 능력은 오히려 증대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로 그렇게 '정치적 힘'을 늘릴 수 있는 것이 강력한 지도자의 덕목인데 우리의 역대 대통령이나 정당 총재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희소가치다.

권력 나눌수록 정치력 커져

이렇듯 우리의 대통령제는 권력의 독점으로 말미암아 국가운영에 필요한 '정치적 힘'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이 자기의 결정으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질 방법이 없는 제도이며 관행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정치를 책임정치라고 하는 것은 권력의 집행자가 자기의 결정에 대해 국민에게 책임을 질 수 있는 방법과 관행이 확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경우에는 대통령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임기 중 사임이라는 극단적 처방뿐이다. 그러한 극단적 방법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의 관행으로는 아무리 불만족스런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임기말까지 '대통령 무책임제'로 표류하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왕적 대통령제, 책임질 수 없는 대통령제, 국정운영의 효율화를 위한 '정치적 힘'을 감소시키는 현행 대통령제를 개혁 또는 개선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선 내각책임제 개헌을 비롯한 많은 한국 정치의 구조개혁안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른 시일 안에 세심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헌을 둘러싼 수많은 파동을 겪어온 한국 정치사의 흐름 속에서 헌법 개정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른 시일 안에 이룬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듯 답답한 상황에서 당장 실현 가능한 개선책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헌법이 명시한 '책임총리제'의 실천을 이번 대통령선거를 통해 확실히 다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86조는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리고 제87조에선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국무총리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 헌법 조문을 뒷받침하는 입법취지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는 국무총리에게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부여함으로써 총리 중심의 내각이 구성돼 국정 운영에 필요한 '정치적 힘'을 증대시키고 제왕적 대통령의 독단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총리 중심의 내각이 국정 운영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국민과 국회에 진다는 것이다. 국정운영 과정에서의 중대한 실책의 경우 또는 국민이나 국회의 신임을 잃었을 경우에는 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총사퇴함으로써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

국무위원 임명제청권 보장을

불행하게도 이승만 초대대통령에서부터 지금의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은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가볍게 여기는 전통을 예외없이 지켜왔다.

'책임총리제'가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리라는 우려와 국민의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바람이 맞물려 헌법 정신에 분명히 위배되는 관행이 큰 저항이나 비판에 부닥치지 않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대통령선거를 몇 달 앞두고 '대통령 무책임제'의 폐단을 실감하고 있는 이 시점이 헌법에 명시된 '책임총리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대통령 후보들은 당선될 경우 헌법대로 국무총리가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확실히 행사할 수 있도록 충실히 노력하겠다고 국민에게 다짐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책임정치로 향한 첫걸음인 것이다.

'책임총리제'의 실현이 한국 정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그대로 방치한 채 인물선택에만 혈안이 되다 보면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든 과거와 똑같은 고질적 병폐가 반복될 수밖에 없음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기에 실현 가능한 정치개혁의 첫걸음이라도 내딛는 것이 한국 정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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