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희망의현장 : 5.대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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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지난 11일 오전 10시, 충남 논산시 등화동 대건고등학교 본관 2층 복도는 2교시 수학시간을 앞두고 '자기 반'으로 이동하는 2학년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한동안 어수선하다가 10분 뒤 수업 시작 종이 울리자 일제히 수업에 몰두했다. 20분쯤 지났지만 딴짓을 하거나 잠을 청하는 학생들은 단 한명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반에서 수업을 받기 때문에 강의내용이 어려워 수업을 포기하거나, 쉬워서 딴짓을 하는 '수업이탈(脫)' 학생들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수학 기초반의 金모(17)군은 "학기 초엔 약간의 열등감도 있었지만 지금은 기초를 충분히 쌓아 상급반으로 올라갈 생각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심화반의 이우민(17)군은 "수준별 구분 없이 공부할 때는 자극을 받지 않았는데 지금은 잘하는 학생끼리 모여 있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다.

대건고는 1995년부터 영어·수학 과목을 심화·보통·기초반으로 나눠 수준별 수업을 하고 있다. 수준이 천차만별인 학생들을 한데 모아놓고 획일적이고 평균적인 수업을 강요해 적지 않은 학생들이 수업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드는 교육현실에서 대건고의 수준별 수업은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이 학교의 수준별 수업은 전임 교장인 강석준 신부가 시작했다.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게 수준별 수업방식을 개발해 잘하는 학생에게는 성취감을 안겨주고, 떨어지는 학생에게는 학습동기를 부여해 전교생 가운데 단 한명도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학생들의 수준은 중간·기말고사, 도교육청 차원의 모의고사 성적을 반영해 결정하며, 학기마다 성적향상 여부를 따져 반 편성을 다시 한다. 성적뿐 아니라 학생 개인의 희망도 고려해 학기 중에 부분적으로 반 이동도 이뤄진다.

실제 지난 학기에 수학 심화반 일부 학생들이 개념정리를 다시 하고 싶다며 보통반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8명의 수학교사가 교과서·참고서 등을 참고해 자체 편집한 교재는 기초부터 심화까지의 내용이 모두 포함돼 있으며, 시험문제는 공통으로 배우는 부분에서 출제한다.

영어과목의 경우 기초부터 고급까지 8단계의 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다음단계로 이동하는 식으로 단계별 수업을 하고 있다.

3학년 박대건(18)군은 "단계별·수준별 수업방식은 다른 학교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며 "단계별로 넘어가면서 적지 않은 성취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학교에서 9년째 수학을 가르치는 김도은 교사는 "8명의 수학교사가 수준별로 모든 학년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수업준비에 대한 부담은 크지만 뒤처지거나 포기하는 학생들이 없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학교 학생들은 노트 대신 파일을 들고 다닌다. 교사들이 수업내용을 인쇄물로 나눠주기 때문이다. 교사가 수업내용을 칠판에 적고 학생들이 이를 받아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여유 시간에 토론식 수업도 이뤄진다.

학생들은 학기 초에 과목별로 '고공표'를 배부받는다. 고공표는 한 학기 동안 배우게 될 내용과 진도 등이 자세히 담겨 있는 수업계획서. 수업과정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듯 조망해 부분적인 암기에 매달리지 말고 하루하루의 수업이 전체적인 연관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넓게 보라는 취지에서 교사들이 만들었다. 2학년 학생들은 자신의 관심분야와 관련된 '포트폴리오 연구과제'를 정하고 1년간 연구해 논문을 제출해야 하는 것도 이 학교만의 독특한 교수법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흥미·진로와 관련된 주제를 정하면 교사 한명이 학생 6~14명의 논문작성을 지도한다. 학생들의 연구과제는 '한방침 요법에 대해''해커가 되는 길''월드컵의 경제적 효과' 등 관심분야만큼이나 다양하다.

학생들은 인터넷 검색·현장실습 등을 통해 과제를 논문형태로 작성, 11월 말까지 제출하게 되고 평가결과는 수행평가 점수에 반영된다. 지난해 '록음악의 역사'라는 연구과제를 제출했던 이세호(18)군은 "1년간 관심분야를 깊이있게 연구한 경험이 진로결정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해창 연구담당 교사는 "과제를 잘 들여다보면 학생의 흥미분야와 진로가 파악돼 유용한 진로지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며 "본인의 관심분야를 자세히 공부하기 때문에 대입 심층면접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학생 눈높이에 맞춘 수준별·단계별 교육은 높은 대학 진학률이라는 결실로 나타났다. 지난해 4년제 대학 진학률은 99%였으며, 올해는 졸업생 3백12명 중 두명을 제외하고 모두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이 학교의 독특한 교수법이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 서울·대전 등 타지 학생 비율이 45%에 달한다.

논산=정현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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