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있는 삽화가 키우기 출판사가 먼저 나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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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국의 교원 출판사는 이달 중순 열렸던 어린이책 견본시장인 이탈리아 볼로냐 도서전에서 단독 부스를 마련해 책 전시를 하며 공고문을 하나 내걸었다. "좋은 일러스트레이터를 구합니다." 조그맣게 내건 이 공고문을 보고 1백여명의 외국 삽화가들이 작품집을 들고 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중에는 안데르센상을 받은 니콜레타 코스타 같은 유명 작가들도 끼여 있었다.

교원의 박두이 편집고문은 "다른 업무가 뒷전으로 밀릴까봐 일러스트레이터 면담을 하루 세시간으로 줄여야 했다"며 "외국 삽화가들이 자기 그림을 세일즈하는 열기에 놀랐다"고 전했다.

한국 작가의 책에 좋은 그림을 보태려고 외국 삽화가를 직접 찾아나선 것은 외국 책을 그대로 번역하는 작업보다 훨씬 세련돼 보인다. 외국 삽화가의 영입은 서구 독자의 입맛을 맞춰줘 한국 책들의 수출 길을 더 넓혀줄 수 있다. 또 국내에서도 독자의 눈높이를 만족시켜줄 대안이기도 하다. 출판사들에 따르면 국내엔 독자들의 기대 수준을 충족시킬만한 1급 삽화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삽화가 입장에서 보면 유쾌할 일은 아니다. 국내 시장 기반이 확고한 상태에서 외국 작가를 수입하는 것은 괜찮지만 현재는 삽화가들 사이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하기 때문이다. 1급 작가들은 장당 40만~50만원의 그림값을 받거나 인세 계약을 맺는 반면, 다른 작가들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외국 작가들이 열성적으로 한국 출판사의 문을 두드린다면 특히 신예 삽화가들은 일감을 쥘 기회조차 없어질 수 있다.

강정선 한국출판미술가협회 부회장은 "신인이 커가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또 대다수 삽화가들은 그림값이 여전히 낮고 단기간에 그림을 끝내 달라는 주문에 쫓긴다"고 말했다. 신예 작가를 키우는 시스템이 없다면 국내 삽화가 부족은 고질병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신인 삽화가를 기용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라고 말하지만, 한국적 색채의 그림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출판사들이 '모험'을 수시로 결행해 주길 바랄 뿐이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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