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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사대주의'삼진아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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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2002년 11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혼란에 빠진다. 한국의 대기업 A사가 보스턴 레드삭스를 인수하겠다고 신청해온 것이다.

외국 자본의 메이저리그 참여를 경계하는 구단주들이 인수 허가를 머뭇거리자 여론에서는 일본 닌텐도사가 소유한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형평성을 들어 허가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결국 A사는 5억달러에 레드삭스를 인수한다.

레드삭스는 한국 출신의 감독과 단장을 영입하고,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박찬호·김병현 등을 트레이드해 온다. 그리고 박찬호는 기존의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함께 선발 '원투 펀치'를 이루고 김선우가 중간, 김병현이 마무리를 맡는다.

타선에서는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와 팀을 옮긴 최희섭과 한국에서 건너온 이승엽 등이 주축을 이뤄 페넌트레이스에서 돌풍을 일으킨다.

레드삭스의 돌풍은 시즌 막판 지구 라이벌 뉴욕 양키스와의 순위경쟁에서 이겨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보스턴 지역의 팬들은 베이브 루스가 떠난 뒤 악몽처럼 계속된 '밤비노의 저주'를 드디어 끝내게 됐다고 흥분한다.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결정전의 상대는 시애틀 매리너스. 매리너스는 이치로·하세가와·사사키 등 일본 선수들을 중심으로 4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레드삭스는 매리너스와의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숨겨놨던 카드를 꺼낸다. 일본에서 활약하던 구대성을 영입한 것. 구대성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치로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끈다.

월드시리즈 상대는 25년 만에 정상에 도전하는 LA 다저스. 다저스는 노모·이시이의 선발 원투 펀치가 맹활약하고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유격수 자리에 일본 세이부에서 활약했던 마쓰이 가즈오가 가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꺾고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레드삭스와 다저스의 월드시리즈는 흡사 한·일전의 양상을 띤다. 박찬호와 김병현이 던지는 공 하나하나에 전 세계가 흥분하고,노모와 이시이의 투구에 미국 야구의 우월성이 위협받는다.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레드삭스가 정상에 오른다. 우승의 순간, 레드삭스의 김응룡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야 시드니 올림픽 준결승에서 미국대표팀의 토미 라소다 감독에게 졌던 빚을 갚은 것 같다"고.

이건 분명 꿈이다. 꿈도 아주 황당하고 야무진 꿈이다. 당돌하게 덧붙이면 메이저리그라면 무조건 품위있고 수준높은 야구고, 한국 야구는 수준차를 떠나 '품질'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국내 프로야구의 '메이저리그 사대주의'를 경계해 소설처럼 만들어본 꿈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20년 동안 꾸준히 성장했고 자부심을 느껴도 충분한 '우리만의 것'을 만들었다. 근육강화제 안드로스텐다이온의 힘을 빌려 70홈런을 날린 마크 맥과이어에게 환호하기보다는 1999년 스물셋의 패기로 54홈런을 때린 이승엽에게 긍지를 느끼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선진야구라는 이유로 메이저리그를 '성경'으로 여기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메이저리그는 '참고서'다. 우리 야구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고 메이저리그와 단순비교가 불가능한 면이 너무도 많다.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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