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종·규원 부자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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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17일, 우리 5사단은 소양강 전선에서 중공군의 춘기 대공세를 맞았다. 쏘아도 쏘아도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산 능선까지 쳐 올라 온 중공군이 사격을 지휘하고 있는 중대장 최 대위와 맞섰다. 서로 총을 쏘아댔다. 중대장도 쓰러지고 중공군도 쓰러졌다. 겁에 질린 나는 대대본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인천학생 6·25 참전사』 제3권 257쪽 인천공업중학교 김용옥 학생 참전기)

최근 ‘인천학생6·25참전사’ 제3권을 펴낸 이경종(왼쪽)·규원 부자(父子)가 인천학생참전관을 둘러보고 있다. 이들은 참전사를 10권까지 완간할 계획이다. [정기환 기자]

60년 전 16세의 나이로 전쟁터에 나섰던 노(老) 학도병과 그의 아들이 사재를 털어 10권짜리 참전사 발간에 나섰다.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때 참전했던 이경종(77·인천 중구 신포동)씨와 그의 아들인 치과의사 규원(48)씨 부자는 최근 『인천학생 6·25 참전사』 제3권을 펴냈다. 2007년 제1권, 2008년 제2권에 이은 결실이다. 이 부자는 참전 노병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제10권까지 완간할 계획이다.

국가나 군이 아닌 민간인이 6·25 전쟁사를 펴내게 된 계기는 1996년 이경종씨가 정부로부터 참전용사증을 받으면서부터다. 아들 규원씨는 “‘그 어린 나이에 조국애를 생각하며 사선을 넘나들었던 게 인제야 종이 1장으로 돌아왔다’며 한숨을 쉬시는 것을 보며 그날의 ‘젊은 사자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60년 전 6·25전쟁이 발발한 뒤 전국에서 수많은 학도병이 참전했지만 인천에서는 한날 한시에 3000여 명이 전쟁터로 떠난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1950년 12월 18일 인천 숙현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에 집결해 20여 일을 걸어서 부산에 도착, 육군과 해병 훈련소에 입소했다. 당시 인천 학생 600여명이 한꺼번에 지원한 해병대 6기는 지금도 ‘인천 기수’로 불린다.

이씨도 부산의 육군제2훈련소를 거쳐 향로봉·금화지구 전투와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등에 참가한 뒤 54년에야 고향 인천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학도병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이씨도 제대 뒤에는 생업에 쫓겨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규원씨는 “아버지의 학교 동창들은 은행지점장·교장 등을 지내셨는데 아버지만 세탁소를 하며 어렵게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게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뒤늦게서야 이런 사정을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부자는 당시 전사한 208명을 포함한 3000여 인천 학도병을 기리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씨는 참전 전우들의 전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생존자들을 찾아 전국 곳곳을 누볐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옛 전우를 만나면 녹음기에 생생한 육성으로 참전기를 담고 빛바랜 흑백사진들과 훈장·전역증서들을 수집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찾아다닌 생존 인천학도병이 500여 명에 이른다. 이씨는 “자료 보충을 위해 다시 찾아가 보면 어느새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가장 슬펐다”라고 말했다.

아들 규원씨는 아버지가 수집해 온 참전 자료들을 정리해 전사로 편찬하는 작업에 수 년째 계속하고 있다. 그는 “발품을 팔아 엮어내는 인천학생참전사는 공식 전사보다 그날의 매캐한 포연 냄새가 더욱 짙다”고 말했다.

올해 펴낸 530쪽 분량의 제3권에는 도솔산 전투 등에 참가한 김현생(인천상업중학교) 해병 등 21명의 참전기를 실었다. ‘전사 인천학생 명단’ ‘참전 인천학생 명단’을 비롯한 관련 자료도 수록돼 있다. 매 권마다 2000여만원을 들여 1000질씩 인쇄해 참전 용사들과 각급 학교에 보내고 있다.

인천=정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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