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든 도시에 '이야기' 입히니 사람향기 물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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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세상 소풍을 끝낸 그분은 지금, 어디에서 쉬고 있을까?

'스스로 받아들인' 가난은 아름답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새처럼 하늘로 돌아간 천상병 시인. 구름 위에 앉아 막걸리 한 잔 하며 지상에서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있을까?

인사동 길거리에서 가끔 천시인의 부인 목여사를 만나 가벼운 인사를 나누곤 하지만, 천상병이 없는 인사동은 어쩐지 허전하다.

천상병 시인을 인사동에 돌아오게 할 수는 없을까. 예를 들어 학고재 화랑에서 이모집 골목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기분 좋게 취해 앉아 있는 시인의 석상(石像)을 만들어놓을 수는 없을까.

세월이 흘러가도 오래도록 그를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곁에 주저앉아 권커니 잣커니 하기도 하고, 애인과 함께 기념 사진도 찍을 수 있도록 말이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은 우리에게, 단순한 기인(奇人)의 풍모가 아니라 '너무 맑아서 허무한' 정신의 한 경지를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사동에 와서 찻집 '귀천'을 찾고 천상병 시인을 떠올리는 것은, 이제는 잃어버린 '사람 냄새' 때문이다.

인사동 작은 골목길에서 향수를 느끼는 것은 골목길에는 스쳐간 세월의 흔적이 있고, 텁텁한 사람 냄새가 있고, 그리고 퇴적해 가는 숱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도시에는 '도시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신도시의 쭉 뻗은 정방형의 가로에는 이야기가 사라졌지만 '휴먼 스케일'의 작은 거리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기에 걷고 싶고 머무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상상을 해본다.

지석영 선생이 천연두 예방 접종을 처음 했던 장소에는 팔뚝을 잡히고 울고 있는 아이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서 있고(청동으로 된 조형물보다는 돌의 느낌이 낫지 않을까) 그 옆에 노란 모자를 쓴 어린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떠들고 있다. 그 길을 벗어나면 국가와 지방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과 같은 고서점들이 보기 좋게 늘어서고, 나이 지긋한 고서점 주인이 옛서적들과 함께 느릿느릿 졸고 있는 '지혜의 가로(街路)'가 나온다.

장욱진 화백의 작업실이 있었던 강변의 소롯길이 젊은 예술가들의 멋진 데이트 코스가 되고, 외국인들과 함께 한옥 거리를 걷다가 들른 '추사 김정희 기념관'은 차 한잔 하며 그의 삶과 인생을 나눌 수 있는 기쁨의 공간이 된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코미디언 서영춘 선생이 도심의 쌈지공원에서 여고생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고, 마포 나루터에서는 민화에서 나온 것 같은 새우젓 장수들이 손님을 부르고, 국밥집이 성시(盛市)를 이룬다. 이야기를 입힌 도시의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도시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인간의 혼(魂)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정책의 상상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상상력이 있는 정책은 꿈꾸는 능력에서 나온다.

흔히 정치가를 '희망의 장사꾼'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에 꿈을 꿀 줄 아는 정치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두터운 규정집을 들고 다니며 '안 되는 구실'만 용케도 찾아내는 꽉 막힌 행정가들이 아니라, 자신이 소신껏 책임지고 '꿈의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그런 행정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청와대에서, 서울시청에서, 도청과 시청·군청에서, 문화인과 예술가들이 윗좌석에 앉고 공무원들이 노트를 들고 전문가들의 '좋은 이야기'를 열심히 메모하는 회의가 매일매일 열리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이제는 퇴락해가는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젊은 대학생들이 팔목을 걷고 나서는 사람 사는 정(情)이 가득한 사회였으면 좋겠다. 국문과 학생들은 가게 이름을 지어주고 디자인과 학생들은 작은 간판을 만들어 주고…. 이렇게 정감있는 지방자치였으면 좋겠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일! 그것이 바로 정치의 존재 이유요 행정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관료적 권위주의 시대의 낡은 의식과 관행을 집어던질 용기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 길은 의외로 쉽게 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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