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제조기 3代…'즐거운 독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저 친구는 워낙 무뇌아라서."(강우석 감독이 김상진 감독에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뻔뻔아'죠."(김상진 감독이 장규성 감독에게)

고감도 독설이다. 상대를 면전에 놓고 이토록 가혹하게 빈정대다니…. 그런데 막상 청자(聽者)는 기분이 상하지 않은 모양이다. 슬며시 웃기도 한다.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것이다.

'공공의 적'의 강우석(42)감독, '신라의 달밤'의 김상진(35)감독, '재밌는 영화'의 장규성(32)감독이 모였다. '재밌는 영화' 개봉에 맞춰 모처럼 자리를 함께한 것. 김감독은 강감독의, 장감독은 김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니 코미디 영화의 '사제 3대'인 셈이다.

이번엔 거꾸로 선배의 작품에 대해 촌평을 부탁했다. 후배들은 자기라면 좀더 경쾌하게 만들었을 거라고 말했다. "숱하게 쫑알쫑알 불평했죠. 조그만 더 '오버'했어도 좋았을 텐데."(장규성→김상진), "콤플렉스라도 있는 건 아닌지. 코미디에 꼭 사회 비판을 넣어야만 할까."(김상진→강우석)

사제간이라 부담이 클만도 한데 세 감독의 얘기는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다. 스승의 날카로운 지적에 자성하는 것 같은 제자가 빈틈을 노려 스승을 역공하고는 모두 한바탕 웃어댄다. 코미디에 '정답'은 있을 수 없다면서 말이다.

강감독은 한국 코미디 영화에 큰 획을 그은 주인공이다. 그의 '투캅스'(1993년)는 영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고 있다. 김감독은 '주유소 습격사건'(99년),'신라의 달밤'(2001년)의 히트로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코미디 연출가로 떠올랐다.

그런데 손자뻘인 장감독이 발칙한 일을 벌였다. '투캅스'부터 '신라의 달밤'까지 한국 영화 스물여덟편을 패러디한 '재밌는 영화'를 만든 것.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틀어 본 것이다.

'재밌는 영화'엔 이들과 관련된 '재밌는' 장면이 나온다. 신인 감독 장규성이 스승인 김감독의 '주유소 습격사건'을 영화 자막으로 '차버리는' 것. 아버지를 부정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발로일까.

장감독이 펄쩍 뛴다. "사실 제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전 반대했어요. 제가 무슨 악감정이 있다고…. 그건 강감독의 주문입니다." 그러자 강감독이 "코미디는 처음부터 긴장을 풀어주어야 해. 장난스럽게 보도록 유도한 장치였지"라고 설명했다. '발길질'을 당한 김감독의 답변이 걸작이다. "그런데 의도한 만큼 효과는 없었어. 영화인은 깔깔거렸지만 일반인은 눈치를 못채더군. 심지어 '재밌는 영화'를 내가 만든 줄 알더라구. 연출이 의도를 따라주지 못했어."

그들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언중유골(言中有骨)의 하이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다. 모두(冒頭)의 '무뇌아''뻔뻔아'로 돌아갔다.

▶강우석=부패한 경찰을 희화화한 '투캅스'에선 나 스스로도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우리에겐 왜 코미디다운 코미디가 없는지를 고민했다. 코미디의 핵심은 사회 비판이다. 사회 병리를 담지 못하면 맥이 풀린다. '공공의 적'에선 코믹한 웃음에 공포를 덧붙였다. 김상진에게선 그런 비판이 부족하다.

▶김상진=그러니까 콤플렉스란 말까지 썼다. 리얼리티 측면에서 보면 내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강감독이 허리 '위'에서 논다면 나는 '아래'에서 논다. 관객의 기호에 충실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장감독은 나보다 훨씬 뻔뻔스럽고 표현도 과격하다. 대중 앞에서 자기 색깔을 지워버렸다.

▶장규성=큰 모험이었다. 패러디는 워낙 어려운 장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얘기틀을 만들려고 했으나 보다 친숙하게 다가가려고 '쉬리' 구조를 빌려왔다. 기존의 코미디를 '개작'하는 건 정말 '쥐약'이었다. 원작 이상의 재미를 보여주기가 너무 힘겨웠다. 차기작에선 분명 내 개성을 담을 것이다.

얘기는 코미디의 대중성 문제로 옮겨갔다. "한국 사회엔 아직도 코미디 감독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제 영화는 철저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인데 평론가들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 사회성을 지나치게 강요한다"고 김감독이 말하자 강감독이 무섭게 반박한다. "그건 좁은 소견이다. 관객과 평론가 모두를 '죽이는' 코미디를 아직 우리가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처럼 질 높은 작품을 만들면 '우리가 졌다'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흥행(돈)과 평가(권력)를 동시에 잡으려 하지마라."

김감독이 수긍하는 눈치다. 10~20대에 제한된 코미디 관객층을 넓혀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남녀노소 전체를 웃길 수 있는 소재 발굴과 연출력 배가를 숙제로 꼽았다.

"제게 영화를 열어준 분들과 함께 하다니 영광스럽네요. '투캅스'를 보고 대단한 충격을 받았거든요. 고답적 문예 영화나 유치한 멜로 영화만 있던 그 시절에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죠. 이번에 너무 많은 것을 벌여놓은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처음부터 천재가 있을 순 없겠죠. 다음엔 작품 전체를 균형 있게 조율할 겁니다."(장규성)

코미디가 넘쳐나는 요즘 영화계. 세 사람은 코미디의 '품질 향상'을 다짐했다. 무조건 웃기려는 억지성 장난 대신 마음을 후비는 솔직한 웃음을 기약했다. 김감독은 자진해서 다시 감옥에 들어가려는 탈옥수를 다룬 '광복절 특사'를, 장감독은 촌지를 밝히다가 서울에서 시골로 전근간 선생님을 그린 '선생 김봉두'를 준비 중이다.

대선배 강감독이 "연출력의 절정에 올랐다"(김상진 감독에게),"촬영분 절반만 보고 감독으로 인정했다"(장규성 감독에게)며 코미디의 진화를 강요했다. 이제 자신의 '유산'을 넘겨줄 시기가 됐다며, '공공의 적'으로 코미디 영화에선 은퇴했다며, 그리고 할리우드가 제작비 1백%를 투자한 첫 한국영화 '실미도'에 전념한다는 말을 잊지 않으며….

글=박정호, 사진=변선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