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종자까지 먹어버린 주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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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우리 조사원이 산골짜기에 있는 이 집을 방문했을 때 아이는 거의 실신 상태였단다. 일곱명 한 가족이 가을부터 야생 시금치 삶은 것만 먹었다는데, 가엽게도 이 아이는 결핵에도 걸려 있었다. 세살 난 여자 아이 아나르 역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 아이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없이 빨래처럼 늘어져 있다. 주사 바늘이 꼬챙이처럼 가는 팔을 찌르는데도 찍 소리 없이 그 큰 눈을 껌뻑거리기만 한다. 4년째 계속되는 기근으로 이미 갓난아이 두 명을 잃었다는 애기 엄마는 임신 중이었다.

조사에 따르면 인구 38만명인 이 지역에는 이런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의 아이들이 10%에 육박한다. 월드비전 치료 급식소 담당 의사인 아지즈는 이런 아이들에게 두시간마다 집중 치료 급식을 하면 일주일 내에 살아나긴 하지만 이미 영양실조가 뇌세포에까지 영향을 미쳐 평생 저능아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급식소 밖 세 개의 커다란 텐트에는 아이들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묵고 있다. 아이는 엄마가 데려오지만 여자는 남자의 동행없이 다닐 수 없어 아버지도 따라와야 하고, 남은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으니 형제·자매들까지 모두 와 있는 거다. 수십명 가족의 세끼 식사도 월드비전에서 해결해 주고 있다.

며칠 있으면서 자연히 그 가족들과 가까워졌는데 이들을 통해 산골의 속사정을 알게 된 건 대단히 큰 수확이었다. 전형적인 농부인 마흔다섯살 이스마엘 파리둔의 얘기를 들어보자. 벌써 2년째 야생 시금치와 토토론이라는 나무뿌리를 주로 먹고 산다는데, 종자 씨까지 다 먹어서 올 봄에는 심을 씨도 없었다고 한다. 어떻게 농부가 파종할 씨까지 먹었느냐고 하자 아이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하소연한다.

실제로 자기 동네에는 지난 3년간 단 한번의 결혼식도 없었고 마을 밖의 공동묘지는 두배로 넓어졌다고 했다. 혹독한 기근을 피해 이란이나 헤라트 등의 난민캠프로 간 사람들도 많지만 자기처럼 가난한 농부들은 차비를 구할 엄두도 내지 못한단다. 이제는 그저 자비로운 신의 가호만을 바랄 뿐이라며 말끝마다 인샬라(신이 원하신다면)를 연발했다.

지금 이들에게 신의 가호는 국제 구호단체들의 식량 배급일 것이다. 다행히 월드비전은 국제식량계획(WFP)의 구호식량을 확보, 이 산동네를 포함한 5개 지역 주민 15만명에게 4월 중순부터 6월 말까지 밀가루와 콩·기름 등을 배분할 예정이다.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집에서 한 사람이 일주일간 도로 보수 등 공익 근로를 하고 받아가게 하였다. 주민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서다.

"지금 당장 제일 필요한 게 뭔가요?" 현장조사를 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토쿰(씨)"이라고 대답한다. 월드비전(02-783-5161, 내선 501·502)은 조만간 구호식량과 함께 주식인 밀 씨앗과 간단한 농기구를 나누어줄 계획이다. 밀 씨앗 10㎏은 4달러(5천2백원), 6개월 후면 20배로 수확할 수 있으니 말 그대로 희망의 씨앗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잔뜩 흐리고 습기찬 바람이 분다. 비가 오려나 보다. 인살랴!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다시 해발 3천m 산을 넘고 벼랑길을 10시간 달려서 바드기스 긴급구호 사업장에 왔다. 2주 전보다 치료 급식소에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고 영양실조 정도도 훨씬 심각했다. 네살짜리 압둘 사이드는 걷지도 앉지도 말하지도 제대로 받아먹지도 못한다. 안아 보니 한줌도 되지 않는 아이가 새처럼 가볍다. 몸무게가 겨우 5.5㎏, 정상 무게의 3분의1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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