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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僧의 家風'이 서린 곳 청·정·도·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해인성지(海印聖地). 경남 합천군 해인사 초입의 자연석에 새겨진 글씨다.

생불이라 일컬어지던 성철의 선필(禪筆)로 해인사를 청정한 수행공간으로

지키고자 했던 기풍이 느껴진다. 최치원이 저잣거리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홍류동 계곡을 찾아 지었다는, 바위에 음각된 제석시(題石詩)도

안녕하다. "거센 계곡물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지척간의 사람 말도 분간 못하겠네/

행여나 세상 시비의 말 귀에 이를까/흐르는 물 시키어 산을 다 감쌌네."

신록이 계곡 물에 어린 지금의 홍류동은 푸르다. 장승처럼 가야산을 지키고 선 푸른 소나무들도 그 빛을 바꿔 본 적이 없다. 하여 소나무는 어느 때 보아도 아름답고 그 기개는 칭송받을 만하다.

근세 고승 경허도 이 길을 걸어갔으리라. 그는 해인사 대중의 간청에 따라 조실로 추대되어 해행당(解行堂)에서 수선사(修禪社) 창설의 법주가 된다. 그해 11월 경허는 퇴설당(堆雪堂)에서 대중과 함께 정혜결사를 하는데, 이러한 선풍(禪風)의 고양으로 근대 선원이 해인사에서 첫 개원을 하게 된다.

이후 퇴설선원에서 제산·용성·동산·효봉·경봉 등이 머물며 대중들을 지도했는데, 특히 사형 언도를 하고 고뇌 끝에 출가한 판사 출신 효봉의 사자후는 지금도 선가에 서릿발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禪)에 뜻을 둔 사람은 인정에 얽매이지 말고 사자의 힘줄과 코끼리의 힘으로 판단하여 지체없이 한 칼로 두 동강을 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여울에 거슬러 오르는 고달픈 물고기나 갈대에 깃든 약한 새나 참죽나무에 매인 여윈 말이나 말뚝을 지키는 눈먼 당나귀 따위가 된다면 그런 사람을 어디에 쓸 것인가."

6·25 전쟁 후 해인사 선원에는 성철·고암·구산·청담·지월·자운·혜암·일타가 가부좌를 틀었고, 현재는 종정에 추대된 법전 스님이 수행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나그네는 퇴설당으로 가 법전스님께 먼저 인사 올리고, 이야기는 해인총림 선원의 선원장 원융스님에게서 듣는다.

"퇴설당을 비롯해 해인사 당우들은 거의 선방으로 쓰였습니다. 선열당·조사전·해행당·관음전·궁현당 등이 그것입니다. 현재는 소림원이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소림원으로 가는 오솔길에는 산죽(山竹)이 무성하다. 나그네는 청담과 성철의 제자이기도 한 원융스님을 뒤따라가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스님은 나그네에게 처음이라며 말한다.

"성철 노장님께서 생전에 노장님 이후 종정이 될 두 분을 예견하신 적이 있습니다. 혜암스님과 법전스님이 그럴 만한 분들이라고 제가 묻자 덕담하셨습니다."

스님은 해인총림 선원의 가풍으로 가행(加行)정진과 108참회를 든다. 10시간 수행하는 다른 선원과 달리 해인총림 선원에서는 14시간 정진한다. 거기에다 경허·만공·성철로 계속 이어져온 108참회가 특징이다. 매일 새벽 5시부터 아침 공양 전까지 자신과 중생의 죄업을 씻어달라는 대참회를 실시하는 것이다.

"우리 선원의 용맹정진은 전국에서 유일합니다. 안거 때마다 1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장좌불와를 합니다. 30분 이상 자거나 자리를 뜨면 퇴방입니다. 절에서 살지 못하고 산문을 떠나야 합니다."

성철의 8년 장좌불와가 생각난다. 상식적으로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들 의아해 하지만 나그네는 한 수행자한테 성철이 문경 대승사 시절 병이 나 지독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눕지 않아 가부좌를 한 성철에게 담요를 둘둘 말아주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간 정신의 극점을 보여준 성철이 수행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성철이 생전에 수행자들이 찾아와 "공부가 안된다"고 하소연할 때마다 "니 정말 공부 해봤노" 하고 오히려 되묻고 꾸짖었음이다.

그렇다. '실제로 하는 것'과 '시늉만 내는 것'은 분명 다르다. 새우깡을 맛보고 새우를 먹었다고는 할 수 없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새우를 먹고 있는지 새우깡을 맛보고 있는지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어 볼 일이다.

결제 중의 소림원은 40여명 정진한다고 한다. 예전 눈 밝은 선사들이 장군죽비를 들고 경책할 때는 선방 분위기가 뜨거웠으나 요즘은 적막한 모양이다. 명안납승(明眼衲僧)이 나서지 않고 공부꾼들이 모여들지 않기 때문이다. 소림원 벽에는 달마도가 걸려 있다. 눈 부릅뜬 달마가 짚신 한 짝을 지팡이에 들고 총령(파미르고원)을 넘어가는 그림이다. 열반한 달마를 중국 웅이산(熊耳山)에 묻었는데, 3년 후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을 다녀오면서 만났던 달마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달마의 부활인 셈이다.

달마도가 아니라도 지금도 달마는 살아 있다. 달마의 정신을 잇고자 하는 후예들이 깊은 산중 선방마다 눈 부릅뜨고 정진하고 있으니까. 산중 꽃은 저 혼자 피지만 그 꽃향기는 계곡 아래로 흐르는 법이다. 이 도리야말로 선방 수행자들이 이 혼탁한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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