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과 '한경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 개인이나 정권의 이념 또는 정책방향을 좌파냐 우파냐로 딱 부러지게 평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말과 행동이 다를 수도 있고 아무리 자신의 이념체계를 문서화했다 해도 실천결과는 달리 나타날 수도 있다. 또 좌우의 논리,보수와 개혁의 정의, 진보와 수구의 관점이 나라마다 학자마다 다를 수 있어 이념논쟁이란 게 자칫 논쟁을 위한 논쟁의 함정에 빠져들 위험도 있다. 그렇지만 대통령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에 대한 이념과 정책검증은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고 문제는 그 검증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함정과 비효율을 피하면서 3金식 정치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의 새 인물을 뽑기 위해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좌우'잣대는 너무 낡았다고 본다. 우리식 좌우익 기준은 일제시대에 형성되어 해방정국에서 절정기를 이루다가 전쟁을 거치면서 '빨갱이'색출을 위한 장치로 형해화(形骸化)된 기준이다.

중심·주변개념으로 보자

좌우논쟁은 전쟁 전에는 토지국유화냐 사유화냐, 친탁이냐 반탁이냐, 국대안 찬성이냐 반대냐, 김일성이냐 이승만이냐로 나뉘어지는 패거리 이념싸움이었으나 전쟁을 거치면서 빨갱이 여부만 판단하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잔재로 남았다. 21세기 오늘의 시점에서 적용하기엔 너무나 슬픈 역사성을 지닌 낡은 잣대다.

그래서 나는 이념·정책 검증을 좌우 가르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중심개념과 주변개념으로 가르기를 제안한다. 중심개념이 뭔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중심세력의 가치관과 이념을 말한다. 크게 보면 자유민주주의이고 시장경제논리다. 매우 막연하지만 이 큰 틀의 개념이 중심개념이고 이 틀에 대한 도전과 개혁요구가 주변개념이다. 한 국가나 사회는 대체로 중심과 주변으로 구성된다. 중심을 이루는 보수세력과 주변의 개혁세력간의 견제와 비판이 건강한 국가와 사회를 이뤄가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중심이 부패하고 힘을 잃으면 주변이 중심으로 이동하고 그 주변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다시 밀려나는 진퇴를 거듭하게 된다.

지난 2월 1일자 중앙일보는 '10대 쟁점을 통해 본 국회의원정책 이념좌표'를 발표했다. 2백37명 의원의 이념·정책해부 기준이 '좌우'구분이 아닌 '보수·진보'기준이었다. 0을 최진보, 5를 중도, 10을 최보수로 보는 이 좌표가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노무현 후보간 이념논쟁의 단서가 됐다. 나는 4.8의 중도개혁노선인데 너는 1.5의 급진 좌파 아니냐는 공격이었다. 참고로 盧후보의 설문 답변을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외교안보정책에서 전통적 한·미동맹관계 복원과 단계적 다변화정책을 답했다. 국가보안법은 전면폐지, 대북지원은 북의 개혁·개방을 위해 확대를 요구했고 재벌개혁문제와 관련해선 출자총액제한 같은 규제와 집단소송제 도입에 찬성했다. 복지예산은 어느 정도 증액, 평준화정책은 유지하되 능력별 수업실시로 하향평준화 문제점 보완, 현행 호주제·사형제 완전폐지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중도라고 자평했다.

이 답안지로 보면 노무현은 결코 빨갱이가 아니다. 보안법·호주제·사형제 폐지라는 급진개혁을 주장하지만 많은 종교인들이 사형제 폐지 주장을 하고 있고 여러 진보적 여성단체들이나 개혁적 지식인들이 공개적으로 호주제와 보안법 개폐를 요구하고 있으니 이들이 빨갱이일 수는 없다. 다만 재벌개혁에선 규제일변도여서 시장경제논리와는 큰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검증자료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이를 기초로 대선후보들에게 보다 광범위하게 질문을 던지고 그 정책과 대안을 묻는 방식이 공염불 이념논쟁보다 훨씬 값지고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검증 자체 시비하면 곤란

또 하나 이 검증과정에서 우리가 기피해야 할 사항은 검증 자체를 편가르기 싸움으로 몰아가선 안된다는 점이다. 이미 언론계 일각에선 후보검증 자체를 편싸움으로 몰아갈 징후를 보이고 있다. 盧후보의 언론관 검증은 그의 민주적 가치관까지 의심할 만한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두고 두고 언론이 검증해야 할 최대 이슈다. 이를 검증하겠다고 나서면 '노무현 죽이기'라며 펄쩍 뛰는 작태는 이미 어느 한편에 서있음을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그런데도 벌써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은 어떻고 '한경대'(한겨레·경향·대한매일)는 어떠하다는 식의 편가르기가 나오고 있다. 검증 자체를 패거리 싸움으로 몰아가려 한다면 이 또한 3金식 구태 언론의 작태를 재현하는 일이다.

좌우 논쟁 아닌 보혁이념과 정책검증, 편싸움 아닌 인물과 정책 검증자료를 충실히 만드는 데 언론이 기여할 때 우리 정치문화는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