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이 날인한 검찰 조서…법정서 부인땐 증거 불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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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검사가 작성한 조서에 서명.날인을 한 피고인이 법정에서 조서 내용이 다르게 기재됐다고 주장할 경우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새로운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지금까지 "피고인이 법정에서 조서 내용을 부인하더라도 조서에 자신의 서명.날인을 했으면 증거능력이 있다"는 판례를 유지해 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6일 "검찰에서의 조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1.2심에서의 유죄판결에 불복해 상고를 한 주모씨 등 보험사기죄 피고인들에 대한 상고심에서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전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검사의 신문조서에 서명.날인한 사실을 인정하면 조서 내용이 자기의 진술내용과 다르게 기재됐다고 주장하더라도 증거능력이 있는 것으로 해석해온 대법원의 견해를 변경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검사가 작성한 신문 조서라고 해도 피고인이 법정에서 '조서 내용이 검사 앞에서 말한 대로 기재됐다'는 점을 인정해야 신문 조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주력해 왔던 검찰의 수사관행도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검찰은 "형사소송법은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조사가 이뤄졌다고 인정되면 조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이 부인되지 않도록 피의자들의 조사 과정에 대한 녹음.녹화 등을 하는 방법을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 "법정 공방 위주의 재판 될 듯"=피고인이 법정에서 "검사의 신문조서 내용이 잘못 기재됐다"고 주장할 경우 검찰은 다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또 조서 내용을 입증받으려면 검사 또는 수사관이 직접 법정에 나와 조사 상황을 진술하는 과정이 필요해졌다.

따라서 재판이 검사와 피고인의 법정 공방 위주로 진행되는 '공판중심주의'가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부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위증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회 풍토가 여전한 상황에서 자칫 피고인들이 '밑져야 본전'이란 식으로 법정에서 진술을 마구 바꿀 경우 재판이 지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체적 진실발견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을 '검찰에서 혐의 내용을 인정한 뒤 법원에서 진술을 번복하면 무죄를 선고받는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정상적으로 작성된 검사의 신문조서를 합리적 이유 없이 부인해 무죄를 선고받는 경우는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재식.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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