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 공모, 선박펀드 등에 부동자금 수조원씩 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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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꼬만 터주면 시중 부동자금이 대거 몰린다'-.

최근 금융시장에선 조금이라도 높은 수익률만 기대되면 순식간에 수조원씩이 몰리는 일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400조원에 이르는 부동자금이 물꼬가 터지기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4, 15일 이틀간 실시된 복합상영관 체인 CJ CGV의 공모엔 2조6226억원이 몰렸다. 경쟁률은 무려 105대1이었다. 공모가액이 2만5000원으로 액면가의 50배나 됐지만, 상장 뒤 주가가 3만원 선을 넘을 것이란 기대로 투자자들이 줄을 이었다.

8, 9일 있었던 인터넷 수능 전문 교육업체 메가스터디 공모에도 1조원 가까운 돈이 들어왔다.

CGV 청약자인 40대 초반의 이모씨는 "최근 한서제약 등 신규 상장 종목들의 주가가 크게 뛰는 것을 보고 높은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청약에 나섰다"고 말했다.

선박펀드도 내놓기 무섭게 팔리고 있다. 삼성증권과 LG투자증권이 최근 판매한 아시아퍼시픽 2호와 3호 선박펀드에는 192억원 모집에 8245억원이 응모했다. '10년간 연 수익률 5.8%에 비과세'라는 좋은 조건이 투자자들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은행들이 비정기적으로 파는 특판 예금이 나오는 족족 며칠 안에 동나는 것도 시중 대기자금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잘 보여준다. 국민은행이 연 3.9%를 걸고 지난 8일 내놓은 특판 예금에 몰린 돈은 3조2000억원을 넘어섰다. 외환은행도 연 4% 예금을 열흘 만에 7200억원이나 팔았다. 이들 특판 예금은 은행이 일상적으로 파는 정기예금보다 금리가 0.3%포인트 정도 높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요즘 예금자들은 금리가 워낙 떨어지다 보니 0.1%포인트 차이도 철저히 따져 매우 예민하게 움직인다"고 말했다. 저금리.증시 침체 등으로 재테크의 스트라이크 존이 아주 좁아져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투신사의 머니마켓펀드(MMF)는 언제든 기동력 있게 움직이는 단기 부동자금이 머무르는 저수지다. 단 하루만 맡겨도 이자를 받고 뺄 수 있는 MMF의 규모는 현재 65조원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말보다 23조원이 늘었다.

한국은행이 파악한 만기 6개월 미만의 단기 금융상품 잔액은 10월 말 현재 393조원이다. 금융회사들은 이들 단기자금이 지난달에는 400조원을 훌쩍 넘어선 것으로 추정한다.

현금 여유가 있는 부자들이나 기업들의 투자 패턴도 통계와 일치한다. 한투증권 박미경 여의도 PB센터장은 "부자들은 현금을 많이 갖고 있다 돈 되는 투자처만 나타나면 집중 공략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투운용 권경업 채권운용본부장은 "실물투자가 부진한 가운데 기업들까지 막대한 현금을 MMF 위주로 굴리고 있다"고 전했다.

시중자금 부동화의 배경은 유례 없는 저금리 상황이다. 게다가 장단기 금리 차이가 거의 없어지면서 자금을 굳이 장기로 묻어둘 이유도 없어졌다. 한국은행 김인섭 차장은 "투자 수단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금을 단기로 굴리려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부동자금의 비대화를 걱정한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 경제연구소 임원은 "부동자금이 넘쳐나는 것은 금융시장의 돈이 설비 투자 등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며 "지나치게 부동자금이 많아지면 또 다른 버블(거품)을 만들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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