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슬로 정신'으로 돌아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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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국제정치학자들 사이에 "조지 W 부시의 외교노선은 ABC"라는 우스갯 소리가 있다. '클린턴 말고는 무엇이든'이란 뜻의 'Anything But Clinton'의 머리글자를 모은 것이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전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추진해 온 외교정책을 모두 바꾸는 것이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반(反)클린턴 노선을 취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북한과 중동이다.클린턴은 임기가 끝날 무렵 북한과 미사일 협상을 거의 타결한 상태였다. 부시는 클린턴이 거둔 성과를 백지화하고 북한을 몰아붙이고 있다.

중동문제에 있어서도 클린턴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해 전력투구했던 반면 부시는 가급적 회피하려는 자세로 일관해 왔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반면 팔레스타인에 대해선 적대적 태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 공격을 테러로 규정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책임을 추궁하는 한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 보복은 '자위권 행사'로 인정함으로써 아랍권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지난 4일 부시가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 중단과 철수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예상 밖이다. 부시가 태도를 바꾼 일차적 이유는 이-팔 분쟁의 확산과 미국의 소극적 태도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미국의 당면 목표인 이라크 공격에 대한 아랍권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팔 분쟁 해결을 위한 노력없이 아랍권의 지지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또 하나는 유럽의 반응이다. 미국이 이-팔 평화협상을 중재할 의사가 없으면 유럽이 나서겠다는 유럽연합(EU)의 주장은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부시의 지시를 받고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7일 중동으로 떠났다. 파월은 현지에서 앤서니 지니 특사와 교대한다. 하지만 특사 대신 국무장관이 나섰다고 협상이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지니의 실패는 그가 무능해서라기보다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 만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0년 9월 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가 시작된 이래 1천6백명이 사망했다. 평화를 정착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 제시 없이 무조건 휴전을 촉구한다고 양측이 받아들일 리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1993년 체결된 오슬로 협정이다. 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돌려주고 그곳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지난달 베이루트 아랍국가 정상회의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제시한 '압둘라 평화안'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허용하면 아랍국가들도 이스라엘과 수교,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는 오슬로 정신을 계승한 것이며, 가장 현실적인 제안이다.

이스라엘은 이번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테러의 인프라(토대)'를 파괴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슴 속에 자리잡은 테러의 인프라를 없애지 않는 한 목표는 달성될 수 없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참담한 현실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한 언제든 자살폭탄 공격에 나설 것이다.어떤 의미에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공동운명체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이려 들면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오슬로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둘 다 사는 유일한 길이다.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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