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 바뀐 특목고 입시 지형도⑤ 사교육은 약일까 독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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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을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요즘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특히 자기주도학습이라는 이름의 전형이 첫 도입된 올해 특목고 입시를 앞둔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고민은 깊기만 하다. “학원을 가자니 입시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되고, 안 가자니 입시정보에 어두워 준비방법을 몰라 우왕좌왕한다”는 것이다.

과목 강좌에 인생설계프로그램까지 합쳐

서울 대치동 A학원, 오후 3시가 되자 한 무리의 초등학생 고학년들이 열을 지어 학원 문을 들어섰다. 올해 새 학기부터 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6학년 권혁준(가명)군은 “모두 영재교육원이나 영재고·과학고를 준비하는 학생들”이라고 말했다. 권군은 수학·과학 올림피아드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그는 “가끔 민사고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도 온다. 대부분 4~5학년 때 시작하는데 난 늦은 편”이라며 수업에 늦을까 발걸음을 재촉했다. 입시에서 자기주도학습 태도를 평가한다는데 학원을 다니면 안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래서 자기주도학습을 배우러 오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학원에 안 다니면 방법을 몰라 입시전형과 경시대회를 준비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이 학원은 초등 4~6학년을 대상으로 수학·과학을 가르친다. 문제풀이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수업을 못 듣는다. 별도 강의실에서 숙제를 한 뒤에야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 교재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단계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학생이 원해도 다음 진도를 나가지 않는다. 수업은 주 3회 하루 3시간으로 수강료는 월 33만원이다. 다소 비싼 편이지만 영재교육원·과학고 입시 대비 자기주도학습태도를 길러준다는 말에 학생들이 몰려든다. 중간·기말고사를 앞두고는 한달 완성 내신대비교재도 별도 제작해 판다. 학생들 사이에선 각 학교들의 수년간 기출문제를 편집한 족보로 불리기도 한다. 평소 학원 숙제에 시간을 뺏겨 내신에 소홀해질 것을 대비해 학원에서 준비한 것이다.

 이 학원 뿐만 아니다. 대치동 일대 대부분 학원들의 강좌는 자기주도학습법이라는 옷으로 갈아 입었다. 심지어 한문 공부와 한자능력검정시험 준비도 자기주도학습으로 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강좌까지 등장했다. 논술고사, 서술·논술형 내신시험, 독서능력평가 등이 확대되면서 한자교육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좌의 이름도 가지각색이다. 개별학습, 스스로문제해결학습, 독립학습, 심층탐구학습 등등. 과목별 강좌에 인생설계 프로그램까지 합쳐진 프로그램도 유행이다. 진로검사·인성적성검사·학습태도검사·독서능력검사·학습계획수립·진학설계 등이 함께 따라 붙는다. 심지어 원생들의 봉사활동 실적을 관리해주기 위해 사회복지기관과 협약 체결을 구상하는 입시학원까지 생겼다. 입학사정관전형의 도입으로 학생 개인의 특성에 맞춘 학습과정과 입시전략의 개별화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아발론 분당캠퍼스 최선화 총괄원장은 “예전엔 점수를 내기 위한 반짝 강좌가 관심을 끌었지만, 지금은 개인별 중장기 관리프로그램을 요구하는 수요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학원수강 ‘쉬쉬’, 소형 입시설명회 인기몰이

자기주도학습전형의 도입으로 사교육 수강은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특히 학교가 절대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 돼버렸다.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을 기른 과정을 평가 받는데 사교육을 받았다고 하면 전형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중3 수험생을 둔 권미선(가명·45·여·서울 양천구 목동)씨는 “포트폴리오·자기소개서·추천서 작성, 비교과활동 평가에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돼 같은 반 학부모들이나 학교측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한다”고 입시 분위기를 전했다. 학생들이 입시학원에 다니기 위해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에서 빠지려면, 학교엔 개설되지 않은 다른 특기를 배우러 간다거나 집에서 독서토론논술 등 온라인 강좌를 듣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댄다. 권씨는 “전형자료 작성과 면접을 위해 사교육을 받은 흔적을 어떻게 없앨지 고민 중”이라며 “사교육이 입시준비 때는 약이지만 입시전형에서는 독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같은 행태가 나타난 데는 학교측의 압력도 원인이 됐다. 사교육 수요를 줄이라는 교육당국의 지침을 받은 초·중학교들이 학생들의 방과후학교 프로그램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에게 수강을 독려하기 때문이다.

 입시가 바뀌면서 소규모 입시설명회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매주 지정된 요일에 정기적으로 강의실에서 입시설명회를 여는 학원들이 부쩍 늘었다. 참여인원도 20~30명 안팎으로 제한한다. 일방적인 설명 위주로 진행되는 대규모 설명회와 달리, 질의응답과 상담 기회가 많다는 이점이 있다. 입학사정관전형에서는 학생 개인별로 대비전략이 제각각 달라 개인의 특성에 맞춘 상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부모 김영신(47·여·경기도 분당 백현동)씨는 “개별 컨설팅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원
에 단체설명회 예약을 요청하는 소그룹 엄마부대들도 있다”며 “설명회에서 수집한 입시
정보는 학교에 관련 프로그램(수업) 개설 요구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입학사정관전형 포트폴리오 작성 가이드를 제작한 이만석 경기고 교사는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놓고 그에 도달하기 위한 안내와 방법은 수험생의 몫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수험생과 학부모는 입시를 준비해준다는 사교육 업체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어 “일기를 쓰듯 자신의 학습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것이 입학사정관을 설득하는 힘”이라고 조언했다.

[사진설명] 사교육을 줄이려는 정부의 특목고 입시개편 정책이 방향만 제시한 채 다급하게 시행되자, 갈피를 못 잡은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입시정보를 구하러 다시 사교육을 찾아 헤매고 있다.

<박정식 기자 tangopark@joongang.co.kr 사진="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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