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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비춘 애니 :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공동저자 고병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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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제목을 조금 패러디해 신간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문학과경계사, 1만3천원)의 성격을 말하자면 한마디로 "이 책은 애니메이션 비평서가 아니다".

물론 이 부정어법 역시 제목처럼 긍정의 향기를 담은 것이다. '은하철도 999''공각기동대'같이 거의 고전으로 분류되는 일본 애니메이션들과, 비교적 최근작에 속하는 프랑스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드 프린세스' 등 모두 12편의 작품을 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대중문화평론집이자 철학서, 나아가 미래담론서로도 읽힐 수 있다는 뜻이다.

필자들도 이진경·고미숙 등과 같이 상아탑 속의 아카데미즘을 거부하면서 문학과 철학, 사회과학 등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는 공동체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들이다. 특히 이 책의 기획에는 "만화평론가인 아내 때문에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고병권씨의 역할이 컸다. 그는 "연구실에 비디오를 가져가 함께 보면서 토론하다 보니 앞으론 종이 위에 쓰인 펜글씨보다 스크린 위에 주사된 빛의 글씨가 철학의 새로운 기호가 될지 모른다는 데 다들 공감했다"면서, "철학용어나 학자들의 인용 등을 보다 부드럽게 처리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무엇보다 이 책이 애니메이션 애호가들의 안목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을 철학적 관점에서 본격 논의했다는 점에서 김용석씨의 『미녀와 야수』와 이 책은 비슷하면서도 사유 내용은 아주 다르다. 디즈니와 일본 애니메이션의 내용 차이가 큰 이유 같다.

"디즈니가 주로 전통적인 동화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데 비해 이 책에서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인간과 기계·기술문명, 자연 등의 대립구도를 갖고 있다.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는 좋은 철학적 소재다."

-마침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가 곧 우리나라에서 개봉된다. 이 작품에 관한 글에서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론가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의 분위기를 암울하다고 말하는데, 난 특히 주인공인 쿠사나기 소령과 인형사가 합체하는 결말부분이 아주 밝다고 느꼈다. '상실된 인간성'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버려진 인간성'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노인Z' 등 다른 작품을 다룬 글들에서도 기계문명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이 보인다.

"'먼곳에 가고 싶어'란 일본만화의 한 장면을 예로 들겠다. 매사를 동전이나 나뭇가지를 던져보고 결정하는 주인공이 하루는 얼굴에 수건을 두른 채 먼지떨이와 총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동전을 던져 선택된 것은 먼지떨이. 자, 주인공은 어떻게 했겠는가. 씩 웃으면서 청소를 했다. 만약 총이 선택됐다면 아마 복면강도짓을 했을 것이다. 수건조차 쓰임새가 달라졌을 거란 얘기다. 기계·기술문명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그걸 어떤 위치에 놓고 어떤 용도로 쓰느냐가 문제다. 그 자체를 인간의 대립물로 설정하고 비판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어쨌든 애니메이션 비평도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이뤄진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계속할 계획인가.

"곧 영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개념의 책을 낸다. 우리는 '철학을 연구'하기보다 '철학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 외의 여러가지 대중문화 텍스트도 적극 이용할 생각이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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