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고,길은 길인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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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봄은 불이다. 바로 그 화기가 봄비를 만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면서 봄은 비로소 봄이 된다. 그지없이 아름다운 북한산을 둘러보노라면 어느새 지리산 실상사 극락전의 봄기운이 예까지 올라와 나를 일깨우고 있다. 내 몸을 어루만지는 지수화풍의 장엄한 봄기운,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불을 주체하지 못해 화를 자초하고, 어떤 이는 그 불씨마저 죽이고 물 먹은 솜이 되어 염세의 나락을 헤매느라 봄은 여전히 '잔인한 봄'이다. 벌목된 나무들과 함께 하는 나는 지금 상처 입은 짐승이다. 봄물이 오르지만 이미 몸통이 잘려버려 꽃은 고사하고 잎 하나 피울 수 없는 나무들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상처 입은 짐승이다.

온 세상이 봄맞이 축제를 벌이는 지금 여기,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피던 꽃들도 입을 앙다물고 황사 바람만 불고 있다. 아니 중국의 황사보다 더한 죽임의 흙먼지만 일고 있다. 북한산을 관통하는 서울외곽순환고속화도로의 공사 강행 때문이다.

'개발에 잠식되는 국토를 방치할 수 없어 최소한 이곳만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를 위해 자연상태로 보전해야 한다'는 취지에 따라 지정한 곳이 국립공원이다. 그런데 그 국립공원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일이 정부 정책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단 한곳, 일본의 예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지형상 도저히 우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수락산·불암산과 함께 수도권 2천만 시민의 '녹색 허파'다. 자연 휴식처요,생태교육장이다. 특히 터널 입출구 예정지역인 도봉산 북서쪽 일대는 희귀 습지식물과 자생란이 서식하는 등 생태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망월사 계곡은 도봉산 경관 중 가장 뛰어난 곳이다. 그러니 국립공원관리공단조차 세 차례에 걸쳐 반대의견을 낸 것이 아니겠는가. 그 합리적 의견마저 묵살하고 형식적인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한 후 허겁지겁 시행하는 북한산 관통도로 공사는 즉시 중단돼야 한다. 서울과 의정부는 생활권이 이미 연결돼 있어 수도권의 교통량 분산을 위해서도 의정부 외곽으로 우회하는 것이 백번 타당하다. 지금의 계획대로라면 도로 개통과 동시에 외곽순환도로가 아니라 국립공원만 훼손한 최악의 내부순환도로가 될 것이다.

산과 바다와 강, 그리고 숲은 그 자체로 현재적 가치일 뿐 아니라 보전돼야 할 미래적 자산이다. 교육이 백년대계라면 도로의 건설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이미 지리산국립공원의 횡단도로인 861번 지방도로가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음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수시로 주차장으로 변하는 이 도로의 차량을 전면 통제하고 순환버스를 운행하자는 등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는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엄청난 혈세를 들여 실패하고 마침내 포기한 시화호·새만금 간척사업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나는 오늘도 벌목된 나무들을 참회의 심정으로 바라보며 돌 깨는 드릴 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진 오색딱따구리를 기다린다. 산토끼를 기다린다. 산은 산이요, 길은 길이다. 길이 아니라면 돌아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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