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내모는 청소년 수련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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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사는 모(18·J고3)군은 시립 수서청소년수련관에 갈 때마다 화가 치민다. 지난해 9월부터 이곳에서 또래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으나 변변한 방 하나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10여개의 중·고생 동아리들도 빈 방을 찾기에 바쁘다.

이 수련관은 건평이 2천여평에 달하는 대형 시설이지만 청소년 전용공간은 단 한 평도 없다. 컴퓨터·에어로빅·수영 등 주부와 어린이들을 위한 유료 강좌 위주다.

군은 "수련관에서 놀라고 하면서 막상 찾아가면 우리를 위한 공간은 없다"며 "청소년수련관이 백화점 문화센터와 다른 점이 뭐냐"고 항변했다.

청소년들에게 건전한 여가 사용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지은 수련관들이 수익사업 위주로 변태 운영되고 있다.

노원·목동·문래 등 서울시립청소년수련관 여덟곳의 지난해 이용인원은 모두 4백50만여명. 시는 이 가운데 청소년이 2백40만여명(54.8%)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24세 이하를 모두 포함시킨 것으로, 유료 강좌를 듣는 어린이·대학생을 빼면 순수 청소년 이용자는 수련관별로 10~30%에 불과하다.

지난해 3월 문을 연 서울 강북구 수유동 강북청소년수련관은 연간 이용자 48만여명 가운데 중·고생 문화행사 참여 인원은 4만2천여명(8.8%)뿐이다.

이곳은 실내체육관 등을 갖추고 있지만 대부분 유료 강좌여서 청소년들은 발길을 돌리고 있다.

인근 K고 2학년 모(17)군은 "체육관에서 농구를 하고 싶어도 항상 어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어서 이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수련관들이 돈벌이를 중시하는 것은 서울시가 시설을 지어 민간에 운영을 위탁하면서 운영비를 거의 지원해주지 않기 때문.

올해 25억원의 예산이 들어가는 노원청소년수련관은 시로부터 한 푼의 지원금도 받지 못했다.

노원수련관 관계자는 "시에서는 일정 공간을 활용한 유료 강습으로 운영비를 충당하라지만 이 돈으로는 인건비와 강사료 주기에도 모자란다"며 "청소년 게임대회나 가요제 등 돈이 드는 행사는 엄두도 못낸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련관들 대부분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광고 전단지를 뿌리는 등 동네 스포츠센터·학원 등과 수강생 확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목동청소년수련관은 직원 32명 가운데 2명만 청소년 업무를 전담하고 나머지는 주로 유료 강좌 지원업무를 맡고 있다.

서울시는 올해 완공 예정인 은평·구로·성북·동대문청소년수련관과 2005년까지 문을 열 다른 곳 등 10곳의 수련관 모두를 자체 수입으로 운영시킬 방침이어서 수련관의 청소년 외면은 개선되지 않을 전망이다.

한 수련관 관계자는 "무조건 시설만 크게 지어 놓고 운영은 나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규모를 줄이더라도 청소년들에게 꼭 필요한 프로그램에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김동석(金東碩)청소년육성팀장은 "계획 중인 수련관을 모두 지은 뒤에는 운영비 지원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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