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편법 번지는 의료계 : "우리藥 써달라" 외제車 뇌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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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 모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전문의 K씨는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지난해 중순부터 진료 실적이 부진하다며 병원 당국자에게서 "적극적으로 고가(高價) 검사 처방을 내라"는 압박을 받아왔다. 결국 얼마 전부터 굳이 필요없는 환자에게도 컴퓨터단층촬영(CT)·자기공명촬영(MRI)·호르몬 검사 등의 처방을 내고 있다. 정부는 21개월 전 의약분업을 전격 시행하면서 의약계의 정화 차원에서라도 분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탈법·편법 행위는 여전하다. 비리가 더 교묘하고,설치는 측면까지 있다. 의사와 약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의료 서비스의 질을 개선하자는 분업의 취지가 현장에서 잘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진료·검사 편법 청구=서울 모 비뇨기과는 성병환자에게 항생제 주사를 처방한 뒤 건강보험이 안된다며 3만원 안팎의 비용을 환자에게 전액 부담시켰다. 환자 P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진료비가 너무 비싸 행정기관에 질의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P씨에게 쓴 주사제는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며, 보험 가격은 2천5백~3천원"이라고 밝혔다.

최근 각종 검사와 CT촬영이 크게 증가했다. 중소병원의 경우 지난해 1월 진료 건당 검사료가 1년 전보다 24%, CT 촬영료는 36% 늘었다. 같은 기간 동네의원의 CT 촬영료도 83% 증가했다. W병원 관계자는 "일부 중소병원들이 경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꼭 필요하지 않은 검사를 남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약 담합 고착=경기도 U시의 한 병원은 처방전을 몰아주는 대가로 주변의 한 약국에 1억원을 요구했다. 약국이 거부하자 "이 돈이 부담되면 주변의 다른 약국과 5천만원씩 나눠내라"고 재차 제의했다.

광주광역시 모 병원은 환자가 처방전을 갖고 특정 약국에 가도록 유도하기 위해 4~5개 화살표 안내판을 설치했다. 이 지역 약사회 관계자는 "병원에 항의했더니 '사실 경영이 어려워 약국을 직영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서울 Y약국처럼 의약품 도매상이 약사 면허를 빌려 약국을 차리고 부근 동네의원과 담합하는 곳도 생겨났다.

서울 서초구 K병원 외과가 발행한 처방전 하단에는 아예 근처 S약국의 이름과 약도가 들어 있다.

◇리베이트 여전=최근 강원도 한 지역의 산부인과 의원이 발행한 질염 환자의 처방전에는 모두 S제약 제품인 세균제·소화제·소염진통제·연고가 적혀 있었다. S제약 관계자는 "처방 대가로 처방 금액의 10~20%를 현금으로 지급한다"고 털어놓았다.

서울 강남구 S내과 의원은 지난 5개월 사이에 소염진통제를 처방하면서 D사 제품에서 또 다른 D사 것으로, 다음에는 I사 제품으로 세번이나 바꿨다. 이 의원 주변 약국의 약사는 "제약사 영업사원이 다녀가면 바로 약이 바뀐다"고 귀띔했다.

일부 대형병원 의사들이 특정회사의 약을 처방해주는 대가로 고급 외제 승용차 등을 받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다.

대형 약국들도 리베이트(약품 거래 수수료)를 받기는 마찬가지다. 경기도 G약국 약사는 "월 5억원어치의 약을 소비하면 이의 3~5%를 리베이트로 받는다"고 말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의약분업을 하면 의사들이 이름난 약만 처방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중소 제약사도 리베이트로 활로를 찾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임의조제 등 성행=최근 한 당뇨병 환자가 의사 처방약이 떨어지자 약국에서 조절제(인슐린)를 사 투약하다 혈당이 극도로 높아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약국이 전문약을 불법으로 판매하는 바람에 환자의 생명까지 위험해진 것이다.

근육통 환자인 충남 S시의 K씨(42·여)는 최근 병원을 찾았으나 문이 닫혀있어 Y약국에서 근육이완제와 진통제를 처방전 없이 받았다. 며칠간 약을 복용한 뒤 온몸에 알레르기가 생겨 크게 고생했다.

경남 J시의 한 약국은 스테로이드 제제를 주성분으로 피부 연고제를 제조해 팔다 환자 얼굴에 온통 여드름이 생기면서 의사들의 항의를 받고 그만뒀다.

◇문제점·대책=정부가 뒤늦게 기준을 만들어 단속에 나섰지만 이미 담합의 뿌리가 깊이 내렸다. 담합이나 리베이트 등은 결국 국민부담으로 돌아간다.

약사회 김대업 이사는 "이같은 행위가 불필요한 처방을 야기해 약물 오·남용을 부추기고 국민 의료비를 늘게 한다"고 비판했다. 편법·불법 행위로 연간 수천억원의 건보 재정이 축나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를 지속적으로 단속하는 한편 담합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처럼 의료기관과 약국이 같은 층에 못 들어가게 하고, 의료기관 경영진이 주변에서 약국을 경영할 수 없도록 관련 규정을 보완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처방전이 몰리고 의료기관과 약국이 붙어 있다고 해서 모두 담합으로 몰아서는 곤란하다는 지적도 있다.

의사협회 안양수 홍보이사는 "의료기관과 약국 간에 처방전을 매개로 금품이 오가지만 않는다면 환자 불편을 줄여주는 협조 행위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윤혜신·백인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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