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6> 제101화 우리 서로 섬기며 살자 ⑤ 320만명 대집회 통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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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첫 날인 1973년 5월 31일 저녁 여의도에는 50만명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그 모습에 대회관계자들은 한결같이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레이엄 같은 거성(巨星)도 떤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많은 인파는 처음입니다. 마음이 떨립니다." 그 솔직함에 나도 솔직히 놀랐다.

마침내 강단에 서려는데 누군가가 급히 내미는 것이 있었다. 받침대였다. 1백66㎝ 단신으로 1백80㎝인 그레이엄과 어깨를 맞추려니 어쩔 수 없었다. 설교가 시작되자 나도 모르는 어떤 힘이 솟았고, 통역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대회 마지막날인 6월 3일에 모인 인파는 1백17만명으로 우리나라 집회사상 최고 기록이다. 연인원 3백20만명이 모였다.

옆에서 지켜본 그레이엄 목사는 역시 하나님이 쓰실 만한 큰 인물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인권문제 등으로 반한(反韓)분위기가 고조되었던 터라 정부에서 특별히 4대의 리무진을 마련해주었는데 그레이엄 목사 부부에게는 캐딜락이 제공되었다.

그러자 그레이엄은 "전도하러 온 나라에서 이렇게 큰 차는 곤란합니다. 좀 작은 차를 줄 수는 없나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둘러댔다.

"한국에선 비록 가난하게 살지언정 자기 집을 찾아온 손님이 밥상을 받지 않으면 손님이 자기를 괄시한다고 생각해요."

55세였던 그레이엄 목사는 집회 전에 통역자인 나와 함께 설교를 준비했다. 그레이엄이 우상숭배자이며 폭정으로 유명했던 구약 속의 아합왕에 관한 이야기를 예화로 들겠다고 하기에 나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그레이엄은 두말 않고 소경 바디메오의 일화로 바꿨다. 박정희 대통령의 오해를 살 필요는 없었으니까.

한국 대회 장면은 ABC·NBC 방송을 타고 미국 전역으로 전해졌다. 그 후 미국에서 '그레이엄 옆에서 통역한 키 작은 목사'를 찾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미국방송이 한국의 인권에 관한 좌담회를 열어도 목사인 나를 즐겨 찾았다. 나중에 자세히 밝히겠지만 박정희대통령과의 인연도 외국 방송의 좌담이 계기가 됐다.

현재 84세인 그레이엄은 아들 크랭클린에게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BGEA)의 책임을 넘겨주고 1년에 한두차례 부축을 받아가며 집회를 연다. 우리로서는 반감을 살만한 세습인데도 그들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든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란 사고가 강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인 룻 그레이엄은 한국에 머무는 2주 동안 후암장로교회로 매일 새벽기도를 다녔다. 세계 교계에서 유일한 한국의 새벽기도를 경험한 셈이다.

그레이엄 목사에겐 한국을 사랑해야 하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아내 룻이 중국에서 태어나 북한 평양의 외국인 기숙학교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의료선교사를 아버지로 둔 룻이 중국에서 평양으로 건너간 것은 열세살이던 1932년의 일이다. 언니 로자도 그 학교에 유학하고 있었다. 그때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었던지 룻은 지금도 간혹 그때를 떠올린다.

통역에 얽힌 에피소드를 한토막 전하겠다. 지금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됐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이름을 아는 정도였다. 훗날 우리가 친해졌을 때 그가 들려준 이야기다.

"헨리 할리가 나에게 통역을 맡기겠다며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집과 테이프를 주었어요. 그걸 가지고 열심히 통역연습을 하는데 다른 사람으로 정해졌다며 미안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김목사가 얼마나 잘 하나 꼼꼼히 들었지요. 그레이엄이 '개미집을 밟아 수많은 개미가 다쳤다'고 말하는데 '여러분, 개미집이 고장났습니다'라고 옮기더군요."

그레이엄 한국대회가 끝난 뒤 조용기 목사가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조목사도 아세아방송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것도 나에게 넘어오고 통역마저 그렇게 되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두 살 많지만 우리는 이제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런 우리를 사람들은 '바늘과 실'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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