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그늘 아래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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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며칠 뿌연 황사에 태양마저 곪는가 했더니 눈부신 봄날입니다. 흰구름 두둥실 떠가고 봄햇살 너무 좋아 점심 후다닥 먹고 짬내어 근처 손바닥만한 쌈지공원을 찾았습니다. 목련꽃 터져 나오며, 활짝 벌어지며 마음 속까지 환한 등불 켜줍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흥얼거리며 이 노래를 배우던 먼 먼 학창시절로 잠시 되돌아 갑니다. 친구와 함께 세상에 좋은 일 다 하리라던 우정이 싹트던 시절이었습니다. 햇살 품은 목련꽃에서 순결한 여성상을 떠올리며 이성(異性)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잘 살고 의미있는 삶일까, 이상적인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묻기 시작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물음이 플라톤의 이데아, 우주적 이상으로 번져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삶과 세상에 처음으로 눈뜨던 시절로 잠시 되돌아가며, 그 아득한 시절에 대한 생생한 그리움에 잠시 몸이 부르르 떨립니다.

문화부장관님! 며칠 전 장관님께서는 제게 "지금 문화가 어떠하냐"고 물으셨지요. 질문이 하도 크게 느껴져 문화의 어떤 가지를 말해야 할지 몰라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상업문화에 질식돼가는 순수문화를 살리자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무슨 무슨 문화하면서 끝없이 문화가 붙여지는 시대,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며 한 세기 모든 것을 떠맡아야 하는 그 '큰 문화'에 대해 감히 아무 말씀도 못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장관님, 저는 도심 쌈지공원 목련꽂 아래서 다시 그 큰 문화를 떠올립니다. 세상에 처음으로 눈뜨던 그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는 지금의 이 마음이 바로 문화의 텃밭이라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미 누군가 말한 "문화는 마음의 등불이요,생명을 이끄는 광명"임을 목련꽃을 바라보며 실감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막스 베버는 단순히 생물학적 조건 아래서 자신의 삶과 행위를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하여 주관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을 '문화인'이라 불렀습니다.

장관님, 그러나 이런 문화, 문화인이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물질적 삶 속에서도 사람다운 사람, 살만한 사회를 위한 텃밭인 문화의 자율적인 장을 평생 지켜내다 올 1월 타계한 프랑스의 세계적 지성 피에르 부르디외는 2000년 가을 서울에 와 문화의 위기를 외쳤습니다. "멸종위기에 놓인 동식물처럼 문화는 현재 경제적 논리에 생존 자체가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다"고요. 상업논리가 문화의 생산과 유통 전과정에 관여함으로써 문화의 자율성이 침해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투자에 대한 최단시일 내의 이윤 확보가 상업논리 아닙니까. 그래서 대중에 가장 잘 팔릴 수 있는 상업문화만 생산·유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란 딜레마를 자체적으로 안고 있습니다. 순수하고 심오하면 희귀하고, 대중화되면 저질·통속으로 빠져드는 이율배반이 문화의 속성 아니겠습니까. 그래 부르디외는 서울에서 21세기를 향해 "문화는 생존 위협을 받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드물고 필요하며 소중한 존재가 됐다"며 그러니 인간과 사회의 자존을 위해 "문화에 투자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관님께서는 "동네 서점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책을 고르는 장면이 가장 성스러운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성스러운 문화적 모습을 우리 사회에 보여주기 위해 실현 가능한 좋은 제안들을 제도화하려고 오늘도 문화예술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장관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상업적 논리로 바삐 돌아가지만 그래도 이상과 그리움을 향한 우리 마음의 텃밭을 비추는 도심 쌈지공원의 이 목련꽃 등불 같은 문화부 장관님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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