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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벽 넘어선 아름다운 충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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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아카데미상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24일 밤(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에서 열린 제74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트레이닝 데이'의 덴절 워싱턴과 '몬스터스 볼'의 핼리 베리가 각각 남녀 주연상을 수상한 것.

74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처음으로 흑인이 남녀 주연상을 수상하는 '대이변'이었다. 흑인이 여우 주연상을 타기는 처음이고 흑인 남우 주연상은 1964년 '들에 핀 백합'으로 시드니 포이티어가 수상한 이후 38년 만이다.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덴절 워싱턴이 오스카 트로피를 번쩍 들어보이자 객석에 앉아 있던 흑인 원로배우 포이티어는 공로상 트로피를 무대로 향해 보이며 워싱턴을 축하했다.

이에 앞서 수많은 평론가의 예측을 보기 좋게 뒤집기라도 하듯 '몬스터스 볼'의 베리가 여우 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순간 '물랭 루즈'의 니콜 키드먼은 감격의 눈물로 울먹이는 베리의 수상 소감을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포이티어는 흑인 배우 최초로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우피 골드버그의 경우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를 네번째로 맡는 영광을 안았다. 올 아카데미상의 열기를 온통 흑인에게 바치는 듯했다.

시상식 분위기는 역대 어느 행사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박하게 돌아갔다. 예정보다 한시간 넘게 진행된 올 행사는 마지막 작품상이 발표될 때까지 전혀 향배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올 아카데미상은 감독·작품상을 론 하워드 감독의 휴먼 드라마 '뷰티풀 마인드'에 안김으로써 '블랙 파워'의 흥분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남녀 주연상은 흑인에게, 그리고 감독·작품상은 백인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기막힌' 흑·백 간 균형을 이뤄낸 것. 2년 연속 남우 주연상을 노렸던 '뷰티풀 마인드'의 러셀 크로는 흑색 돌풍 앞에서 고배를 들어야 했다.

올 아카데미상은 정치적으로도 관심을 모았다. 지난해 9·11 뉴욕 테러 이후 많은 전쟁·액션영화들을 내놓으며 보수·우경화 경향을 보였던 할리우드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기 때문이다.

평생 뉴욕에서 작업하며 로스앤젤레스에서 거행되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도 불참했던 우디 앨런 감독이 코닥극장 무대에 올라 많은 할리우드 제작자에게 뉴욕에서 영화를 찍을 것을 당부했다.

특히 행사 중 무대에 잠시 올라온 배우 케빈 스페이시는 9·11 사건에 대한 짧은 추모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올 아카데미상은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한 셈이 됐다. 흑인 배우들을 대대적으로 포용하며 그간 아카데미상의 '맹점'으로 지적됐던 인종 간 장벽을 크게 낮추는 동시에 9·11 테러의 충격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여유를 보였던 것.

이 여파로 휴먼 드라마 '뷰티풀 마인드', 초대형 팬터지 '반지의 제왕', 현란한 뮤지컬 '물랭 루즈'의 뜨거운 3각 대결은 빛을 바랬다.

총 13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선전이 기대됐던 '반지의 제왕'은 분장·촬영·시각효과 등 네개 부문을 수상하며 종반까지 '뷰티풀 마이드'에 크게 앞서나갔으나 최종 순간 '노른자'인 작품·감독상 등을 '뷰티풀 마이드'에 양보해야 했다.

올해 신설된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에선 드림웍스의 '슈렉'이 영광을 차지했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는 주제가상을 받았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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