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튼칼리지냐, 입시명문이냐 … 하나고의 진로 고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창의성 교육도 좋지만 이렇게 공부를 안 시키면 좋은 대학을 어떻게 갑니까? 특목고 다니는 애들도 주말에 학원을 다니는 판국인데….”

지난달 24일 서울 은평구 하나고를 방문한 이 학교 설립자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곤혹스러워했다. 김 회장과의 면담에 나선 10여 명의 학부모들이 교과 공부 외에 체육·예술·봉사활동에 초점을 맞춘 이 학교의 교육 방식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하나고는 영국 이튼칼리지 같은 ‘명품 학교’를 지향해 설립된 서울 지역 최초의 자립형 사립고다. 학비가 연 1200만원이나 돼 ‘귀족학교’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사교육비가 추가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큰 인기를 끌었다. 지난 3월 첫 신입생 모집에 7배가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하지만 개교 3개월 만에 이 학교의 교육 방식이 학부모들의 저항에 부딪친 것이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날 학부모들은 김 회장에게 ▶체육과 미술·음악 중심의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인 ‘1인 2기 프로그램’의 축소 ▶매 주말 외박 허용을 요구했다. 창의성 교육의 일환인 1인 2기 프로그램에 따라 하나고 학생들은 매일 체육과 음악·미술 활동을 해야 한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은 외박도 월 1회로 제한됐다. 학생들이 주말을 이용해 사교육을 받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외박을 안 나가는 주말과 휴일엔 클럽활동·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하나고 김진성 교장은 “지성과 덕성·체력 그리고 감성이 조화된 창의적 인재 육성은 우리 학교가 개교 전부터 주창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라고 한다. 재학생 김모(16)군은 “다양한 활동을 경험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학부모는 “그러다 명문대 진학에 실패하면 아이의 인생은 누가 책임지느냐”고 우려한다. 학부모들의 불안은 학생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김군 역시 “예전에 밤늦게까지 학원에 다닐 때보다 공부를 안 하는 것 같아 불안할 때도 있다”고 했다.

학부모와 학교 측의 갈등은 교사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다. 이 학교의 한 관계자는 “특목고에서 온 교사들을 중심으로 입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며 “특목고 출신 교사들은 첫 입학생의 진학 성적표가 초라하면 더 이상 지원자가 몰리지 않는 현실을 잘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성과 체력, 감성이 조화된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이 학교의 목표가 입시 경쟁이라는 현실적 벽에 부딪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자 학교 측도 타협점 찾기에 나섰다. 하나고 관계자는 “학부모들의 요구와 입시 현실을 무시하기 힘들다”며 “1인 2기 프로그램을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월 1회 외박’ 원칙을 고수키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고려대 교수를 그만두고 하나고에 온 김 교장은 “영국의 이튼 칼리지 같은 명문학교를 만드는 게 하나고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사교육에 매달린다면 다른 특목고나 자율형 사립고와 차별화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학교는 지난 4월 벤치마킹 대상인 이튼칼리지 토니 리틀 교장을 초청해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김성천 부소장은 “창의 교육과 입시 교육 간의 논쟁은 대안학교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며 “글로벌 인재 육성을 위해 궁극적으로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학교와 학부모,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선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