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균이를 기억에 떠올리는 것은 그야말로 '씨네마 천국'에 주인공으로나 나올 법하게 그는 할리우드 영화광이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르게 되었던 때문이다. 그애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영등포시장 모퉁이에 가게를 얻어 옷장사를 시작했는데, 형제도 없던 태균이에게는 온 하루를 제 맘대로 보낼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영등포시장 부근에 일제 때부터 진작에 영보극장이 있었고, 전쟁 뒤에 철도 공작창으로 들어가는 철길이 가로놓인 새말 어구에 '상이용사 회관'이라는 영화관이 생겼는 데다, 저 안쪽 공장지대 근처인 새말에 '남도극장'까지 생겼다. 그러니 바닥도 별로 넓지 않은 중심가에 일주일에 한번씩 프로가 바뀌는 영화관이 셋이나 생긴 셈이었다. 그애네 점포는 길가의 모퉁이 집이라 포스터를 붙이기에 맞춤한 장소였다. 포스터를 붙여주면 으레 초대권이 따라 나오는데 물론 주초는 안되지만 끝날 때쯤에 공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담배가게나 분식집 겸한 만화가게 유리 문에 포스터가 붙기 마련이고 대개는 입장권의 반액쯤 할인된 가격으로 포스터권을 팔았다. 태균이네 엄마는 옷가게라 따로 포스터권을 팔 수도 없었던지 아니면 시장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표를 나누어 주었던지 하여튼 태균이는 신나게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가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을 영화화한 '노트르담의 꼽추'를 보고 와서 우리들을 앉혀놓고 스스로 주연배우가 되어 영화 이야기를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다.
-그랬는데 말이지…. 군사들이 까맣게 성벽으로 올라와. 꼽추가, 정말 더럽게 무섭게 생겼더라. 인상을 쓰면서 기름이 끓는 가마솥을 미는 거야. 사정없이 가마솥을 뒤집어. 우와, 군사들이 올라오다가 막 기름에 튀겨져서 떨어져 죽는 거지.
꼽추 콰지모도가 짚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보호하려고 노트르담 사원을 방어하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사실 연극이나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내 쪽이 그보다는 훨씬 빨랐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다녔으니까. 그렇지만 전후에 학년이 높아지면서 어머니가 내 학과공부와 성적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영화 구경은 끝이 되었다. 겨우 집에서 책을 읽는 것만은 허락을 했지만 그것도 숙제 검사가 끝난 뒤에라야 가능했다. 그러나 감시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맘때의 부모들이 얼마나 바빴던가. 나는 태균이에게서 준비한 용돈으로 가끔씩 포스터권을 얻어내기 시작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