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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대조선은행’ 창립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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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께의 한성은행. 현재의 서울 중구 다동 개천변에 있었다. 대조선은행 창립 발기인 중 일부는 이 은행 설립에도 관여했다. 민간 보통은행을 표방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귀족의 자금 관리를 도맡아 ‘귀족은행’으로도 불렸다. 해방 후 조흥은행을 거쳐 현 신한은행으로 이어졌다. (사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96년 6월 16일, 서울 광통교 옆 화폐 교환소에 김종한·안경수·이완용·이채연·이근배·윤규섭·이승업의 7인이 모였다. 이들은 통상(通商) 업무를 담당하면서 외국 문물에 일찍 눈을 뜬 관료들과 개성 상인, 개항장 객주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설립 계획이 마련되었다.

은행 이름은 ‘대조선은행’으로 하고 같은 달 25일 ‘독립신문’에 주식 모집 광고를 실었다. “자본금은 이십만원으로 정하여 사천 주로 나누고 매 주에 오십원씩 하여 삼차에 나누어 내시되 초차의 이십원 재차의 십오원 삼차의 십오원으로 정하였사오니 초차 이십원은 본월 이십오일부터 칠월 말일 내로 받겠사오니 기한 내에 정동 벽돌집 은행창립소로 보내시고 재차 삼차는 은행 사무가 개시되는 대로 추후 다시 광고하겠삽.”

1894년 갑오개혁 때 모든 세금을 돈으로 받기로 하자 은행이 필요해졌다. 이해 7월 10일 군국기무처는 국고금 출납을 담당할 국립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했으나, 그에 필요한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돈을 꾸어주겠다고 약속한 일본은 차일피일 이행을 미뤘고, 얼마 뒤 정권이 바뀜으로써 국립은행 설립안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돈으로 돌아가게 된 세상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국고금을 가지고 ‘돈놀이’만 해도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장삿속에 밝은 사람이라면 쉬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대조선은행은 이 국고금 취급을 노리고 설립됐다. 그러나 영국인 탁지부 고문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이 반대했다. 자본이 적고 경험도 없는 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에는 일본 데이이치은행을 통해 조선의 금융을 지배하려 한 일본의 입김도 작용했다. 결국 대조선은행은 일반 상업은행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1899년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한흥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몇 년 뒤 소멸했다.

대조선은행의 뒤를 이어 1897년에는 대한특립제일은행과 한성은행이, 1899년에는 대한천일은행이 각각 설립됐다. 돈이 지배하는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은행의 할 일도 많아졌으니, 지난 한 세기 동안 수많은 회사가 명멸(明滅)하는 중에도 은행이 망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한제국기에 설립된 은행 다섯 개 중 세 개가 여러 차례의 합병을 통해 지금껏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기업인이 농자(農者)의 자리를 차지한 오늘날에는 ‘가뭄에 단비’보다 ‘양질의 자금’이 더 중요하다. 은행의 일은 생산과 유통의 두 바퀴로 가는 수레를 뒤에서 밀어주는 것일 텐데, 어째 요즘에는 앞에서 끌고 다니는 듯하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