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날 싫어해도 검찰은 살아야" : '이용호 수사' 마무리 앞둔 차정일 특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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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 난해 12월 11일 시작된 '이용호 특검' 수사가 사흘 남았다.1백5일 동안 특검팀은 많은 일을 했다. 검찰이 밝혀내지 못했던(?) 굵직굵직한 사실들을 들춰냈을 뿐만 아니라 여론의 의혹을 받아온 정치적 커넥션에 대해서도 밑그림을 대충 그려냈다.

특검팀 전원의 사명의식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국민들은 그런 팀워크를 만들어낸 차정일(車正一)특검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법조계에서도 "뚜벅뚜벅, 그의 소 걸음이 특검수사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바꿔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가 특검으로 임명됐을 때만 해도 특검팀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저 그랬다. 1990년 서울지검 공판부 부장검사를 끝으로 17년 검사 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현역시절 특별히 주목받을 것이 없었고, 그의 취임 일성도 "자의반 타의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할 만큼 했다"는 평가 속에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특검수사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

"파김치가 됐지요. "

건강은 괜찮으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보람있는 시간이었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목소리는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은 마음으로 원칙과 정도에 따라 수사를 하겠다"던 특검 첫날의 약속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듯 힘이 있었다.

그리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국민들의 성원과 격려가 가장 큰 힘이 됐다.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검사 출신으로 이용호씨 수사 상황을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에게 전해준 전·현직 검찰 간부들을 조사하는 등 검찰에 상처를 주게된 것이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이 바로서기를 바란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안이나 국가나 기강이 서야 하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검찰은 반드시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라면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는 검찰 조직이 제 위상을 회복하려면 정치검사가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권 실세에 줄을 대서 출세하려는 검사들이 대부분의 순수하고 유능한 검사를 욕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의 힘으로 요직에 앉은 인물이 유능한 것처럼 보여서는 안된다며 정치권이 검찰을 이용하려 할 때 검사로서의 자부심으로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특검 수사에서 스스로 정치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여야가 국민적 합의에 의해 결정한 특검입니다. 여야 어느 쪽도 신경쓰지 않았고, 신경을 써서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외부 전화와 사생활도 철저히 관리했다고 생각합니다. "

車특검의 그런 입장에도 불구하고 중간수사 결과 발표가 정치적이었다는 지적이 있다는 말에 그는 "당시 이수동씨 사건으로 언론 등이 너무 과열돼 있었고, 엉뚱한 보도도 나와 조치가 필요했다. 압수 문건을 공개한 것도 모든 면에서 투명하게 알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그런 지적보다는 수사팀 중 3명이 이수동씨측에게서 고소당한 것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특검수사 연장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데 대해 그의 입장은 분명했다.

특별검사는 원래가 한시적 입법이고, 한시적인 조직인데다 기본적인 토대에 대한 수사는 했기 때문에 더 이상 특검 수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원래 수사의 주체는 검찰이고 특검이 못 다한 것은 당연히 검찰로 넘어가 수사가 이뤄질 것이다. 신망이 두터운 이명재 총장을 믿고 있다"며 "또 수사팀이 강행군을 해와서 탈진 상태"라고 특검 연장 불가론을 폈다.

그러면서 그는 "아쉬운 부분도 있고 섭섭할 때도 있지만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닌가"라고 했다.

현 역 검사 시절의 모습이 궁금했다. '성공한 특검'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는 67년 사법고시 8회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서울대 법대와 대학원, 군법무관을 거쳐 73년 부산지검 검사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뒤 대구지검 안동지청에 부임한 지 열흘도 안돼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사건을 맡았다.

살인죄로 재판을 받은 사람이 "억울하다"며 진정을 낸 것이다. 이미 기소된 범죄자의 진정이었지만 그는 육감적으로 '뭔가 잘못됐구나'라고 느꼈다. 그리고 한달간의 수사 끝에 결국 진범 두명의 자백을 받아냈다. 위증 사범과 고문 수사를 한 경찰 형사계장도 처벌됐다. 그는 '정의를 세우는 보람이 이런 거구나'라는 걸 이때 처음 느꼈다고 했다.

시련도 있었다. 85년 대검 중수부 중수4과장 때였다. 중수부 과장이면 검사들에겐 선망의 자리다. 뇌물 혐의로 조사를 받던 국세청 사무관이 조사실에서 전화선으로 목을 매 자살을 기도했다.

'불명예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유서까지 남겼다.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수사관들이 조사실을 비운 사이 일어난 사건이어서 지휘책임자인 그에게 책임이 돌아왔다. 그는 당시 대검 차장에게 "모든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내겠다"고 했으나 결국 '좌천성 인사'로 사건이 마무리됐다.

車특검은 그 때부터 '잘하면 아랫사람의 공로요, 잘못이 있으면 상관의 몫'이라는 신념을 굳혔다고 했다.

그러나 이 일로 6개월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됐다. 기관지가 나빠져 '금연만이 살길'이라는 진단을 받고 서울 청량리 위생병원의 금연학교를 다니면서 시작한 금연이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3년 후인 88년 4월 9일 담배를 다시 끊고 지금까지 한번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고 교·고시 동기인 부장판사 출신과 함께 90년 합동변호사 사무실을 낸 후 그는 '돈 잘 버는 변호사'였다.

변호사 초기 "서초동 사건을 싹쓸이한다"는 소문도 났고, 나중에는 '수임료 1천만원' 미만인 사건은 맡지 않아 수임료 인상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변호사 개업을 한 이유에 대해 "검찰이라는 조직의 논리가 내 원칙과 자유를 제약할까봐 조직을 떠났다"면서도 "공무원 월급으로 자식들 과외공부시키기가 만만치 않았다"고 토로했다.

부인 유옥순(58)씨와는 고시를 붙은 뒤 대학원 시절 친구 소개로 만났다. 부인은 한국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장남 상원(30)씨는 사업을 하고 있고, 장녀 상미(28)씨는 지난해 외무고시 출신과 결혼했다.

'원칙과 정도'를 자주 거론하는 그의 가훈은 '정직과 성실'이다.

현역 시절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한 법조기자는 그를 "순수하고 정많은 원칙주의자"라고 평한다.

97년 동업하던 변호사가 골프치고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숨지자 충격을 받아 캐나다로 1년여 동안 외유를 다녀왔다.

돈 많은 변호사였던 때문인지 IMF사태 후였던 당시 그가 캐나다로 떠나자 "환차익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악성 루머가 돌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늙어서 외국 나가니까 뭔가 의심스러워서 그런 루머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검사'였고 '돈 많이 번 변호사'였던 그를 특검 수사는 일약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그런 점에도 약간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 특검팀 가족들이 인화 단결해서 정말 열심히 했다. 정말 고맙다"고 공을 특검팀에 돌렸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곱슬머리, 수영으로 다져진 단단한 체구에선 늘 고집과 치밀함이 느껴진다. 썩 잦지는 않지만 두주불사에 '마이 웨이'를 즐겨 부르는 명가수로 알려져 있다.

21일 밤 특검 사무실이 있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감정원 근처 음식점에서 특검팀 '쫑파티'를 연 그는 "당분간 변호사 활동을 접어두고 쉬고 싶다"고 했다.

부인·아들과 함께 사는 강남구 청담동 빌라에서 조용히 책도 읽고 수사기간 거의 가지 못했던 교회, 그리고 좋아하는 북한산도 자주 찾을 예정이다.

김승현 기자

차정일 특검은

▶1942년 서울 출생

▶61년 서울고 졸

▶65년 서울대 법대 졸

▶67년 제8회 사법고시 합격

▶69년 육군법무관

▶73년 부산지검 검사

▶75년 대구지검 안동지청 검사

▶77년 서울지검 검사

▶80년 수원지검 여주지청장

▶82년 부산지검 마산지청 부장검사

▶83년 마산지검 부장검사

▶85년 대검 중수부 4과장

▶86년 부산지검 형사1부장

▶87년 서울지검 북부지청 특수부장

▶88년 서울지검 북부지청 형사1부장

▶89년 서울지검 공판부 부장검사

▶90년 변호사 개업(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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