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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픈 조선王 : 공부에 치이고 종기 달고 살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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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거치며 조선시대의 왕과 왕실은 '버려야 할 권위'로 치부돼 왔다. 그 와중에 궁중 문화는 상당 부분 왜곡되고 생명력 잃은 문화재로만 남게 됐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신명호씨는 최근 펴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돌베개)를 통해 의례·복식 등 모든 문화의 집결판이라 할 왕실 생활문화사를 복원하고 있다. 신씨는 이번 책에서 수라상·복장·업무 등 24시간의 일상부터 임종·장례 등까지 꼼꼼하게 다루고 있다.

◇왕들의 아침=오전 4시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쇠북 소리(파루)에 기상했다. 파루를 신호로 남대문·동대문·서대문만 열리는 게 아니라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려 왕까지 눈을 떠야 했다. 조수라(아침 식사)전에 쌀죽인 죽수라를 가볍게 들고 12개 접시에 탕·찜·전골 등 반찬을 담은 12첩 반상을 받은 뒤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 외전으로 나갔다.

◇일과 공부로 짜여진 하루 일정=아침 조회, 국정 현안 보고 받기, 회의 주재, 신료 접견 등이 공식 업무며, 하루 세 차례 공부를 하도록 돼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왕은 편전에서 왕의 비서인 승지가 접수해 미리 검토하고 요약해 놓은 공문서에 결재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처리할 문서가 많아 붓으로 일일이 결재하기가 힘들면 내시에게 계자인(啓字印)이라는 도장을 찍게 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는 진시(오전 7시~9시)에 약식 조회인 상참을 하고 오시(오전 11시~오후1시)에 주강(낮공부)을 했다고 적혀 있다. 왕의 공부는 경연(經筵)이라 하는데 승지들과 홍문관 관원, 의정부 대신들이 참석했다. 경연은 하루 세 차례가 원칙이지만 보통은 하루에 한 번, 혹은 며칠에 한 번도 했다. 경전 본문 서너 줄 정도를 읽고 경연관이 음과 뜻을 설명하면 참석자들이 각자 의견을 펴는 식이었다. 때에 따라 토론이 격렬해져 정치 토론장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래 앉아 공문서·상소문을 보며 눈을 혹사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왕들은 3대 태종때부터 눈병과 종기를 유전병처럼 달고 살았다. 정조의 경우 큼직한 벼루만한 종기가 등 전체에 퍼져 서너되의 피고름을 쏟기도 했다고 한다. 또 왕들은 고단백 식사를 하면서도 운동량은 부족해 비만·당뇨·고혈압 같은 성인병에 시달렸다.

◇복잡한 장례 절차=임종한 날 머리와 상체는 기장 뜨물과 쌀뜨물로, 하체는 향내 나는 나무인 단향을 달인 물로 목욕을 시켰다. 목욕 후 새 옷 아홉벌을 입히는 습(襲)을 하고 시신 입에 쌀과 진주를 넣었다. 시신은 평상에 모시는데 여름이면 평상 아래 얼음을 채웠다고 한다. 사흘째는 19벌 옷으로 감싸는 소렴(小殮)을 하되 다시 살아나길 기대하며 끈으로 묶지도 얼굴을 덮지도 않았다. 닷새째는 90벌 옷으로 시신을 감싸고 나머지는 관 속에 채워 넣는 대렴(大殮)을 하고 입관 준비를 했다. 빈전이라는 곳에 시신을 가매장했다가 5개월후 좋은 날 국장을 치렀다.

◇묘호 짓기=살아서의 업적을 평가하는 이름이자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인 묘호는 두 글자로 이뤄졌는데, 2품 이상 재상들이 세가지 묘호를 추천해 올리면 왕위를 이은 왕이 그중 하나를 택했다. 뒤 글자는 '조(祖)'나 '종(宗)'으로 끝났는데 조는 국가를 창업하거나 중흥시킨 대업을 완수한 왕, 종은 선대의 통치 노선을 평화적으로 계승한 왕을 나타냈다.

이 책은 궁중문화·수원 화성·백자 등 하나의 주제를 잡아 한국 문화의 맥을 짚는 '테마 한국문화사 시리즈' 가운데 하나다. 백자의 제작 방법 등을 다룬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축성기술과 실학사상을 설명하는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이 이번에 함께 나왔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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